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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데일리 [8호] [네마프토크] 세기말과 유토피아 운동
2015-08-13 16:13:54
NeMaf <> 조회수 2045

8월 12일 5시 산울림 소극장에서 카를 야베르 감독의 <프릭 아웃Freak Out>이 상영되었다. 상영이 끝난 후 '세기말과 유토피아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이지행 영화연구가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이하는 강연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유토피아

 유토피아라는 것은 그리스어로 ‘없는(OU-)' '유'와 '장소(TOPPOS)' '토피아' 라는 두 말을 결합해 만든 용어입니다. 유는 없는, 좋은 장소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단순하게는 이상적인 사회, 즉 '대안적이고 이상적인 공간과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유토피아는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 살면서 아직 가보지 못한 더 멋지고 근사할 것 같은 대안적인 삶과 세계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기 때문에 고대부터 존재해왔습니다.그래서 고대 그리스 로마시민들은 서사문학 속 “아르카 디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르카 디아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풍요하고 전혼적인 땅, 평화의 땅을 의미합니다. 또한 플라톤도 유토피아에 대해 '사람들이 살기 정의로운 국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합당을 배분 받는 사회'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유토피아의 개념은 과거부터 실험되었고, 사람들이 불만을 가져오게 된 이유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16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가 지리적 혹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좋은 곳 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유토피아는 플라톤과 고대시인들 뿐만 아니라 문학 속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개념입니다. 문학은 유토피아를 가장 잘 재현하는, 시대, 역사를 나타내는 장치이자 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 속에는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이 존재합니다. 17-18세기에는 계몽주의적인 유토피아를 상상했습니다. 계몽주의적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가장 유명한 문학은 18세기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입니다. 이 책 속 무인도의 변화 지점을 보면 초기에 겪였던 돈, 물물교환 등이 발생하는 갈등이 경제학 서적처럼 자세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문명에 의해 원시사회가 개발되어 가고 자기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에 가까워지는 것을 그려냈습니다. 18세기까지 문학에 이러한 계몽주의적 사회가 자주 등장했다면, 19세기-20세기 초반으로 넘어오는 소설에는 사회적인 유토피아들이 주로 등장했습니다. 19세기말-20세기 초에는 정치적 격동과 공산주의 혁명이 있었습니다. 평등을 모토로 삼은 사회를 지상에 건설하고자 하는 유토피아를 생각했죠. 이처럼 지상에서의 유토피아를 완성하고자 하는 문학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스토피아

19-20세기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한축을 이루었던 것은 ‘디스토피아’ 입니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반대말로 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미래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디스토피아를 건너야 유토피아가 나올 수 있겠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완전한 반대말이 아닌, 미래에 대해서 바라보는 이중적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나타났던 시대는 조금 더 미래의 유토피아가 상상적 재현속의 아름다움보다는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순간, 과학기술이 비학적으로 20세기에 발전하며 관념적으로 꿈꾸던 유토피아가 현실적이고 논리적으로 실현될 것인가, 과학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도움을 받아 실현될 것인지 그려졌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판적 미래상에 대한 문학이 많았던 이유도 과학의 발전과 연결되어있습니다.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에는 20세기 초에 유명했던 두 소설,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있습니다. 이 두 소설은 디스토피아 소설이지만 미래에 대해 반전의 상, 서로를 비추는 반쪽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4 경우 빅 브라더 라는 가상의 독재자가 이들을 항상 감시하며, 파시적인 미래의 상이라고 말하죠. 반면에 멋진 신세계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정점에 서서 기술발전, 의약발전에 의해 아무도 병 때문에 고통 받지 않으며, 오래 살기 때문에, 많은 이유들로 인해 바닥까지 우울해요 끔찍하죠. 현대의 시대상과 같습니다. 그리고 두 소설을 비교하면 서로 다른 세계를 말하는 것 같지만, 현대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두 가지 지점, 삶의 형태에 대해 지적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1984에서는 국민들이 책을 읽지 못하게 해요. 책을 통해 정체성을 가지게 되며, 이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반항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읽지 못하게 합니다. 반면에 멋진 신세계의 국민들은 아무도 책 따위를 읽지 않아요. 책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사소한 재미들이 가득하기 때문이죠. 무거운 주제들에 관심을 둘 여력이나 열정이 없어요. 사소한 것에 집착해서 무거운 주제에 대해 외면하는 사회를 드러내고 있죠. 두 소설 모두 디스토피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소설 속에 나타나는 유토피아를 통해 인류문명의 공과 나쁜 점, 좋은 점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계몽주의 유토피아가 많이 나온 이유는 발전가능성, 미래에 대한 낙관들이 자신들의 사회를 발전시켰다는 확신과 기쁨에서 나오는 것들이죠. 그리고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그 당시 발전한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 억압에 대한 안 좋은 감정들을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상에 실현함으로써 반전시키려는 노력들을 소설 속 유토피아들이 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 꼭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로 발현된 것은 아닙니다. 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기술 결정 주의적인 순진한 SF 영화들, 기술이 인간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것이라는 트랜스 휴머니즘적인 유토피아 소설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지금의 주류 상업영화계에서 트랜스 서사들이 환대 받지 않아요. 우리가 많이 보는 영화는 디스토피아의 전망에 대한 이야기죠.

  

벨 에포크 시대

영화 속 시대는 “벨 에포크”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시절” 이라는 뜻입니다. 배경이 되는 벨 에포크 19세기 말-20세기 초는 정확히 따지자면 1871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1914년까지의 파리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화려한 시대를 의미합니다. 프랑스 전쟁이 끝나 잠정적 평화가 오는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 40년 정도 불안정한 평화가 유지되던 시기였죠. 이 시대는 문학성, 예술성이 폭발했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가 지속 가능했던 이유는 잠정적 평화도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낙관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왜 이 시기 사람들은 낙관적인가, 사회적 변화가 그 원인입니다. 이 당시 사회는 정보 통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전신, 전화 등 전신의 발전은 곧 초기 금융 자본주의의 설립과 관계가 있습니다. 금융의 글로벌화는 전신, 정보통신의 발전을 통해 이뤄졌죠. 제국주의의 피크이자 저물어가는 시기였고, 제 3세계나 식민지들로부터 많은 물건들이 유럽으로 흘러넘치던 시기였습니다. 소비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가 팽창했고 정보 통신에 대한 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였으나, 낙관만 있었다면 역설이란 말은 쓰지 않았겠죠. 비관도 존재했습니다.

시대상에 관한 비관, 19세기 말-20세기 초에는 글로벌 금융위기, 공황이 있었고, 20세기 초에 드러나지 못했던 사건들이 있기에 미래에 대한 확신, 낙관과 시대상에 대한 비관이 공존해서 우리가 이 시대를 위대한 ‘역설의 시대’, 벨 에포크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분명한 지향이 존재했습니다. 소설에서는 미래에 대한 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테크노피아 소설이 있는 반면 <Freak Out>의 공동체원 처럼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원시농업적인 유토피아 소설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테크노피아와 원시농업으로 나뉘어서 각자의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모든 것이 공존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비관, 낙관 그 어느 것으로 단정하기 어려웠지만, 지금보다는 역동적인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Freak Out>(2014), '위대한 역설‘의 시대의 대안공동체

몬테 베르타는 이 시기에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주의들은 평화주의, 채식, 반자본주의였는데, 자본에 저당 잡히지 않으며 자급자족하며 심플, 간결하게 살아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편한 옷을 입고, 머리를 기르고, 누드로 다니고, 문명과 자본에 의해 저당 잡히지 않는 삶을 유지하고 온 것이죠.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출신배경입니다. 이들은 모두 부르주아 자제들이예요. 주도적인 인물들, 특히 이다 호프만과 그녀와 짝이 그랬었죠. 또 이들은 20대 초 유럽 예술가들의 아트 스쿨의 역할도 했습니다. 이들은 유럽에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이름을 알렸다는 건 많은 예술가들이 모였다는 의미도 되지만, 영화 속 이들은 요양원을 세웠잖아요. 자립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이 요양원이 이름이 나면서, 유럽사회에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당시 대서양을 넘어 미국까지 이들의 활동과 트렌드, 정신들이 전파되기도 했죠. 나중 20세기 중반, 60년대 꽃이 핀 미국 서부 쪽을 중점으로 히피문화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 바로 이 공동체였던 것이죠.

 

이렇게 대서양 미국 서부까지 전해지면서 영향을 주었던 멋있는 '대안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실험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어요. 중요한 문제가 돈 때문이었죠. 가족의 지원을 받아서 요양원과 식당을 세웠고, 식당의 모토, 자신들의 슬로건은 채식 전문 식당이었는데, 그 뒤 1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운영이 어려워지자 채식이라는 자신들의 본질적 이유를 포기하고 고기메뉴를 내세웠죠. 이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점점 자기들의 이상을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본질적 슬로건이 무너지면서 조직이 무너지고 와해되기 시작했죠. 두 번째는 항상 우리가 대안공동체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막판에 무너지게 된 이유가 바로 방종 때문입니다. 이들은 외부에 알려지게 되고, 다양한 구성원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장점도 있지만 약화시키는 단점도 있죠.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등을 돌리게 되죠. 제일 컸던 외부적인 사건은 바로 1차 세계 대전입니다. 1차 대전으로 인해 전 유럽이 위축되고 있었는데, 몬테 베르타만 잘 살 수는 없었죠. 그래서 전반적인 무대가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 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었죠.

영화에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뭔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끝장내고는 한다. 파괴하고자 하는 속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요. 유토피아 공동체들이 인류역사상들에 있어왔지만 마지막에는 공동체가 와해되면서 끝이 나요. 인류사회에서 공동체는 조직이며, 무언가를 유지하고 조직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원래가지고 있는 이상을 폐기하거나 와해해야하는 지점이 꼭 다가오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죠. 이들도 반 자본, 반 문명, 채식, 그들의 슬로건을 가지고 소탈하게 유지해왔는데 돈이 있어야 자립할 수 있다는걸 깨닫고 배척하고 싶었던 부르조아 부모들에게 돈을 받아 식당을 만들고, 자신들의 채식을 지향하고 싶었지만 경제적 운영이 어려워서 고기메뉴를 등재 시키는 것처럼 무언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폐기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꿈은 결국 부질없는 것인가, 실현되지 않고 저 하늘 위에 떠 있기에 우리가 이상향으로 꿈꾸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향으로써의 가치를 가지는 것인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토피아의 실패, 파국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비관적인 반 휴머니즘을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가이아 가설이 있습니다. 지구를 가이아로 보고 언젠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가 가이아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번성하고 지속적으로 창조하게 된다면 가이아가 마침내 그들을 살수 없게 만들 거라고 해요. 가이아의 역습이라고 하는데 인류가 현대문명에 들어서면서 해왔던 것이 가이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발전이 파국의 이유다. 계속 발전하면 우리는 종말에 다가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이면 결국 와해될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정서로 공동체 실험을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왜 이런 두 가지 방식으로 이들은 지속되지 않았을까, 왜 역사적으로 공동체들은 이런 식으로 끝을 보게 되었을까에 대해 두 가지 상상들이 가능하게 되었죠.

16-17세기 유럽이 초기 자본주의에 진입한 시대에도 그 뜻에 반대하여 시골로 숨어버리는, 원시 농업적인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네덜란드, 북유럽 등 존재하였습니다. 16,7,8세기까지 종교, 원시 농업적인 공동체를 꿈꾸는 단체들이 대안공동체를 만들었고, 19세기 미국에서는 주로 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정치적 이유, 종교적 이유도 있지만, 종교적 이유로 만들었던 공동체들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 다음 최근의 공동체는 60년대 히피공동체입니다. 이 사람들은 미국사회의 개인주의, 탐욕, 전쟁, 폭력 등을 거부하고 소박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돌아가서 자연에서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이들의 성격은 미국에서 독재적으로 나타났기보다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경향성과 비슷했습니다. 이렇게 모여든 공동체들은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에 미숙하고 성적 방종 등에 의해 관계들이 소원해지고 쉽게 와해되는 지점들이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파국의 시대

19세기말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공동체의 역사가 있다면, 위대한 역설의 시대. 낙관, 비관도 있었지만, 이 영화 속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그 시대와 이 시대가 닮아있는데, 닮은 것이 다릅니다. 19-20초가 위대한 역설의 시대였다면 20세기 초-21세기는 파국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내가 자랄 때 세상은 지금과 흡사했다”. 여기에서의 지금은 지금입니다. 2010년대, 글로벌화, 자본주의, 금융위기, 소비주의, 그리고 정체, 이 모든 것들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 당시 제국주의와 소비 자본주의가 19세기에 팽창하고, 금융자본주의 초기에 진입하며 여러 난리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소비가 주는 파편적 지점들이 있었다면, 지금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 파국의 시대라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파국과 종말은 어떻게 다를까요? 종말은 물리적 종말, 파국은 종말의 가까운 돌이킬 수 없는 위험 , 재난이 닥쳐 종말로 인도하는 그 중간지점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세기말을 지나 21세기로 진입하는 밀레니엄 시대를 파국으로 분류하는 시선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진짜 세기말인 90년대는 19세기 말과 비슷했습니다. 90년대는 동북권 붕괴를 시작으로 열렸으며,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영원한 자유로 끝이 났다고 생각했어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영원한 자유로 끝이 났으며, 더 이상 이데올로기로 인한 전쟁은 일어날 일이 없을 것이며, 자유 민주주의 한 길로 나아가는 꽃길이라 생각했어요. 냉전이 끝나고 행복으로 90년대가 시작 되었으며, 인류의 생존 관련 생명공학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 밀레니엄을 앞에 두고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문명적인 바이러스들로 인해, 세계가 정보화되었지만 컴퓨터가 시간을 읽는 것을 멈추게 되면 많은 것들이 엉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엉망들은 인간의 생존 위협과 관련된 것들이였죠. 이런 식의 종말에 대한 루머들과 낙관될만한 상황들이 90년대에 존재하였습니다.

지금의 세기도 인류 문명, 역사를 규정짓거나 변화를 이끌었던 사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오기까지 모든 혼란과 불안을 응축시신 대표적인 사건은 911테러입니다. 테러가 일어나고 미국은 애국자 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당신이 테러용의자로 의심되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할 수 있다. 언젠가 구금해서 심문할 수 있다는 법입니다. 그때 당시 미국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 용의자 취급을 받아야 했죠.

이런 식으로 21세기 십자군 전쟁이라 불리는 이라크 전을 촉발시키기 위해 911테러가 사용되었고, 보수주의들이 힘을 얻는데 많은 역할을 해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파국의 양상

 

환경/생태 : 복합재해

과학기술 : GMR - 포스트 휴먼

정치/경제 : 신자유주의/ 금융 자본주의

환경, 생태에 대한 파국들은 지금 당장 어쩔 수 없는 지구, 자연의 권력이기 때문에 복합적인 측면을 보입니다. 후쿠시마 경우 지질 해일보다 원자력 폭발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후쿠시마 사건을 통해 자연 재해는 혼자 오지 않는다, 현재의 생태적 재난의 복합성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해일이 덮치는 것보다 발전소가 녹는 과정에 집중했던 이유는 현대 자연 재해는 복합적인 요소 보다는, 어마어마한 팩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현대의 파국적인 양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 기술적인 파국입니다. GMR은 유전공합, 나노공합, 로봇공합을 뜻하며, 인간기능의 확장에 기여하는 생체기술들입니다. 포스트 휴먼을 통해 죽지 않으며, 병이 없는 장수, 로봇 틱스, 인간이 필요 없는 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발전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과학기술의 파국이 큰 이슈가 되는 이유는 과학기술을 통한 인공지능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많은 로봇공학 학자들이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뛰어넘는 시기, 특이점이라고 하는 시기가 언제 올 것인가 예측해보았을 때, 그 시기는 10~15년 정도 남았다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것이며, 이것이 인간존재의 소멸이라는 종말에 대한 핵심적인 이유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지식의 확산을 통한 대량 살상의 접근 가능성입니다. 10년 전엔 인터넷으로 폭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얼마 전 한국수력원자력발전소의 해킹사건을 통해 멀리서 손대지 않고 간단한 클릭만으로 파괴적인 성과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스템을 세워도 그에 대한 대응전략은 등장하기에, 새로운 기술이 나올수록 불안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과학기술의 열매는 결국 자본이 독점할 것이며 유포를 관리하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큰 계층 차이를 만들게 될 것이며,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와 떨어진 디스토피아적인 사회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과학발전의 파국이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이유 중 하나죠. 이런 식으로 지금은 19세기 말의 벨 에포크 시대에 비해 힘을 잃었습니다.

이전의 시대들은 언제나 세기말, 종말의 끝에 대한 불안, 새로운 시작에 대한 낙관이 교차되어 있으나, 미래는 다시 시작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많은 학자들은 지금의 세기는 과거의 세기말과 다르게 아무도 미래, 종말에 대해 끝만 볼 뿐 새로운 시작이라는 낙관을 보지 않는 마치 타락한 천년왕국 신화를 보는 것과 같은 시기라고 보고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 대한 큰 가치에 대해 도전하거나 연합하여 공동체를 이루기보다는 동력을 잃고 패배주의적 시기로 돌아가는 분위기가 많이 번져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없는건 아닙니다. 각자 자기 삶의 문제들과 협동조합 문제들이 벌어지지만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사회를 바꿔보자는 사회주의 유토피아, 계몽주의 유토피아들이 파편화되고 사라져버린 시대에 우리는 유일한 권력, 소비자의 권력만 외치는 시대가 된것 입니다. 우리가 시민보다는 소비자로써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시점에 온 파국의 루트를 밟고 있습니다. 그래서 21세기는 진정한 파국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아무도 이 파국을 넘어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문: 비관적 시대를 예술 영상예술들이 어떻게 반영하고 있으며,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SF영화들은 계속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특히 주류 할리우드 영화들, 그건 세계에 대한 현실을 영화에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90년대 SF영화, 아마겟돈은 1인 미국 영웅이 세계를 구해 종말이 오지 않는다는 뻔한 스토리였어요. 항상 마지막에는 지구를 살려내고 장밋빛 뒷이야기를 맞이하는 것이죠. 이를 통해 우리를 종말론적 불안에서 안심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주류 할리우드에서 누군가가 지구멸망이라는 흐름을 멈출 수 있다는 의지가 아니라 지구를 멸망시키며 끝나는 영화도 있고, 현재는 소각상태이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불길한 느낌을 풍기는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주로 지구의 종말모습 조차도 엄청난 모습, 스펙타클한 모습으로 표현해왔지만, 요즘은 과거처럼 즐길 수 있도록 표현하지 않습니다. 더 우드 같은 경우, 시작과 동시에 몇 초 동안의 종말이 주인공의 얼굴에 비친 수심으로 표현이 됩니다. 예전의 관습과는 다르게 즐길거리를 남겨놓지 않는 방법으로 표현하죠. 21세기 SF영화들이 지금 이 세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할리우드가 캐치한 것 같습니다.  

 

강연  |  이지행 영화연구가

기록  |  한진희 루키

사진  |  유현식 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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