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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데일리 [LECTURE] <안토니아스 라인>을 통해 보는 삶과 비체 공동체의 가능성
2019-08-20 12:51:57
NeMaf <> 조회수 773

8 19일 오후 8,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이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의 ‘<안토니아스 라인>을 통해 보는 삶과 비체 공동체의 가능성강연이 열렸다. 김장연호 집행위원장의 진행 하에 이뤄진 이날 강연에는 풍부한 인문학적 해석으로 마를린 호리스 감독의 <안토니아스 라인>을 살펴본 한편, 비체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 논해볼 수 있었다. 

 

 

이현재 : 안녕하세요, 이현재입니다. 저는 <안토니아스 라인>을 비체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서 분석을 해보고자 합니다. 공동체는 학생들이 싫어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공동체가 나에게 해준 것이 없고 공동체의 윤리를 따라 봤자 이득이 없다는 거죠. 하지만 <안토니아스 라인>은 바로 이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 하에서 가능할까요? 

 

1. 모계와 비체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정서적 조건들

 

우선 모계와 비체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정서적 조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모계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모계에 대한 설명을 잘 해놓은 것이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라는 책입니다. 여기에 보면 생산양식 혹은 사회적 조건과 관련하여 가족 구성이 어떻게 바뀌는지, 어떤 식으로 모계가 부계로 바뀌는지, 어떤 식으로 모권이 부권으로 바뀌는지에 관한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굉장히 오래전부터 클래식처럼 보아 온 책인데요, 이상하게도 요즘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떻게 과거의 군혼, 혈연가족, 푸날루아 가족의 형식이 대우혼이 되었다가 가부장제 가족이 되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일부일처제 가족이 되었는지를 생산 양식의 발전 과정과 더불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모권제는 가능했을까, 어떻게 모계는 가능했을까를 생각해보세요. 

 

엥겔스는 루이스 모건과 원시 씨족 사회의 원형이 바로 모권제 씨족에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씨족 사회는 근본적으로 모계가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죠. 더 재밌는 것은 모권제 씨족의 사회적 조건은 수렵과 채집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수렵이나 어로에 종사하며 이동하며 살던 그 시절에는 인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인구가 많지 않았기에 서로 경쟁할 일이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토지나 생산물은 씨족 공동체의 소유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시공동체 씨족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가장 주요한 가족 형태가 푸날루아였고, 이는 점차 대우혼으로 변모합니다. 이때까지의 인류학적 역사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모권이나 모계가 보이는 사회일수록 실제로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고, 어느 정도는 수렵이나 채집에 의존을 했고, 토지나 생산물을 갖게 되더라도 그것이 씨족 공동체의 소유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생산양식에서 푸날루아 가족이 형성되는데, 푸날루아는 같은 형제가 같은 자매의 부인들을, 같은 자매가 같은 형제 남편들을 공유하는 형태입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의 아내, 한 사람의 남편을 주요한 혼인관계의 구성원으로 여기는 대우혼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대우혼도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일부일처제와는 거리가 조금 멉니다. 왜냐하면 이 친밀 관계는 일단 1:1의 관계가 나타나지만 완전히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었고요, 지금의 결혼과 달리 그 관계를 계속해서 지속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이 시대의 생존은 씨족 공동의 문제였고, 아이의 양육도 공동체가 함께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배우자를 특정하거나 결혼 관계를 영속화 시켜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씨족은 공동체가 먹고 쓸 만큼의 생산을 하였고 따라서 권력의 불균형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엥겔스는 “씨족 제도에는 지배와 예속이 있을 수 없다는 데에 그 위대성과 동시에 한계가 나타나 있다.” 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와의 배타적 관계를 맺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거죠. 오늘날의 결혼 제도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아이를 여성이 출산하는 한 여성을 중심으로 계보를 따지는 것이 더 확실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저 당시에는 지배층이냐 아니면 예속 상태이냐 하는 계급적 구분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모계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모권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떤 독점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지금의 권력의 의미인데 이러한 맥락이 아니기 때문에 모계라고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이미 엥겔스가 조망하였고, 실제로 저런 생산양식을 갖던 시대에는 가부장적 양식이나 일부일처제의 양식이 거의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여러 차례 반복되었던 각종 혁명들이죠, 기술혁명들. 특히나 엥겔스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목축 및 농업 혁명입니다. 이게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기점이 되는지를 봅시다. 목축, 대규모 농업으로의 전환과 함께 잉여 생산물이 발생했다는 것이 굉장히 커다란 사건입니다. 이 목축이라는 것은 떠돌아다니며 가축을 키우다 이제는 한꺼번에 많은 가축들을 우리 안에 가두어 놓고 키우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그러고 나니 가축들에게 먹이를 줄 사람이 필요로 하게 되죠. 그래서 대규모의 농업 또한 필요해집니다. 정착 생활로 인해 대규모의 목축, 그리고 대규모의 농업이 시작되면서 이제는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잉여생산물은 남는 것이죠. 이처럼 잉여생산물이 발생을 하면서 원래는 모든 것이 공동체의 것이었다가 어떤 개인적인 사람의 축적물,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권과 가부장제와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여기서 엥겔스가 지적하는 점이 바로 역할 분담인데, 그 당시 힘을 많이 쓰는 목축과 농업을 남성들이 담당하고 여성들이 가사 노동을 담당하게 됩니다. 재밌는 것은 많은 잉여 생산물이 생겨 사적 소유를 발생시키는 목축과 농업을 남성들이 하게 되면서 남성들이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가사 노동이 평가절하 되는 시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정착생활과 함께 부성이 확실시되면서 더 이상 모계를 따지지 않아도 되는 타이밍까지 왔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유 재산의 축적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나누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계급이고, 계급이 발생했기에 씨족은 더 이상 공동체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즉, 목축과 농업을 통해 사적인 소유가 가능해지면서 남성들은 권력을 획득했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전쟁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축적한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가부장적 개별 가족관계를 확립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가부장적 가족의 탄생입니다. 일부일처제의 탄생이기도 합니다. 생산양식이라는 문제는 젠더 분화, 나아가 젠더 억압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죠.

 

2. 사회계약은 어떻게 가부장제를 지속시키나

 

여기까지가 인류학적 고찰이었다면, 이제는 근대로 이동해 근대의 사회계약은 어떻게 가부장제를 지속 시켰는가를 살펴봅시다. 여기서 가부장제의 개념은 공동체적인 것과 반대적인 것으로 가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사회계약론은 근대의 원자론적 개인이 확립된 이후의 인류 역사입니다. 시민 계약은 원자론적인 개인에서 출발합니다. 모든 인류, 모든 개인들을 위한 사회계약 혹은 모든 시민들을 위한 국가라고 이야기하며 근대 국가가 출범합니다. 근대 국가의 출범에 중요한 것이 사회계약론이었습니다. 근대 국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제시했거든요. 하지만 흥미롭게도 캐롤 페이트먼(Carol Pateman)이라는 여성학자가 근대 사회계약론의 창시론자 중 하나였던 홉스의 시민 계약론을 주목합니다. 당시의 시민 계약, 국가가 어떻게 사회계약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정당성을 획득하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대답을 했던 저 시절에 홉스를 비롯한 많은 계약론자들이 자연 상태를 많이 이야기해요. 자연 상태란 지금 상태의 문명적인 것들을 추상화해 내면 그 상태는 어떠했을까에 대한 상상이에요. 그 상상 안에서 자연 상태가 어땠을 것인가 추측하는 것인데 홉스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리바이어던>에 나오는데, 리바이어던은 거대 국가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대 국가가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이때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어떤 지배 질서도, 어떤 결혼 법률도 당시에는 없었다”라는 말을 합니다. 또한 “힘이나 신중함에 있어서 개인들 간에는 어떤 현저한 차이도 없다, 그리고 남녀 결합도 일시적이다”라고도 합니다. 엥겔스가 말한 씨족 공동체 사회 같은 모습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죠. 그리고 자연 상태에서 여성은 자유롭고 평등했습니다. 심지어 홉스는 육체적으로도 남자에 비해 열등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성을 열등하게 보거나, 육체적으로 약하게 보게 된 것도 일견 문명의 결과라고 보고 있는 거죠. 이러한 의미에서 홉스가 어떤 부분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이 보는 통찰적인 의식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캐롤 페이트먼은 인정을 해주고 있습니다. <리바이어던>을 읽어 보자면, “자연 상태에서 여성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항상 힘이나 신중함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장기계약으로서의 결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이 부재한 상태에서 아이는 어미니에 속할 수밖에 없다”, “아이를 낳는 모든 여성은 어머니이지 군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자연 상태에서는 이랬던 것들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요.

 

근대 국가에서는 왜 사회계약을 맺을까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보죠. 바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기 때문에 싸운다고 말합니다. 일정한 재화를 둘러싸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기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홉스의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설명이 흐려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어떻게 됐길래 여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걸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 사회계약론으로 가게 되면 갑자기 남성들만 등장을 합니다. 이것이 홉스가 본인이 살았던 시대의 의식을 완벽히 벗어나지 못한 부분인 거죠.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대비하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의 일부를 국가에 내어주고, 국가에게 강력한 권력을 위임하였기 때문에 국가가 그 권력을 담보로 모든 사람들이 싸우지 않도록 법을 통해 보호해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에 동의함으로써 사회계약이 성립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여성과 남성 모두 시민으로서 동등했어야 하죠? 하지만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시민 계약 이후 참정권 획득이나 시민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고대와 똑같이 남성뿐입니다. 남성들 중에서도 어떤 남성들이냐, 소유권 즉 사유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권리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맥락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싸워서 이겨 자원을 획득하고, 진 사람은 노예가 됩니다. 남성들조차도 진 사람은 노예가 됩니다. 홉스는 최초의 가족을 혈연 가족이 아닌 주인과 노예가 같은 밥을 먹는 한 식구라는 의미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노예라는 소유물을 가지고 있는 주인뿐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어디 있나요? 또 물어보죠. 갑자기 여성은 싸움에서 진 걸로 나옵니다. 자세한 설명은 없어요. 하지만 캐롤 페이트먼의 추측에 의하면 아이 때문에 불리했을 거라고 합니다. 아이가 있는 상황에서 싸우기란 매우 불리했을 것이고, 따라서 노예와 같은 위치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란 것이죠. 그리고 노예로 만든 여성을 자신의 아내처럼 맞이하게 된 것이 바로 가족입니다. 당연히 여성도 노예이기 때문에 시민권이 없는 거죠. 사회 계약의 주체가 아닌 겁니다. 따라서 근대 사회 계약론에서 말하는 원자론적 개인은 소유권을 가진 남성 개인입니다. 이쯤 되면, 캐롤 페이트먼이 물었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습니다. 왜 근대의 시민 계약은 가부장을 지속시켰는가. 소유권을 가진 남성들이 자신의 권력을 국가에 양도함으로써 자신의 소유권을 보호받는 체제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민 계약입니다. 그렇다면 국가가 해주어야 하는 가장 큰 임무는 무엇일까요? 갖고 있는 소유물을 남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근대적인 가부장제는 신 계약과 함께 정당화됩니다. 이것이 캐롤 페이트먼이 작성한 논문의 주된 담론입니다. 그러니까 부인과 어머니는 정복이 된 거죠. 그런데 이때의 계약을 보면, 주인이 노예를 막 죽여도 되는 것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노예가 복종을 하면 주인은 이 노예를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예에게 있어 사실 어떤 상황이 더 최악이냐면, 이 집을 벗어나 아무런 공동체가 없는 저 산속으로 가게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은 정말 미지의 세계,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드글거리는 세계이죠. 따라서 주인은 노예를 관대하게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주인이라는 어떤 미덕 같은 것도 생긴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불리한 위치에 처한 여성들도 노예의 자리에 있기 되는 것이죠.

 

캐롤 페이트먼은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사실을 더 이야기합니다. 아버지의 지배가 곧 권력관계였던 것이 전통적 가부장제였다면 고전적 가부장제를 주장했던 필머가 성경에 근거하여 가부장제의 정당성을 피력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렇게 주장한 가부장제의 내용이 사회계약론 이후에도 유효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 평등하다는 사회계약론 이후에도 이러한 메시지가 계속해서 관철될 수 있었죠. 캐롤 페이트먼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은폐된 사회계약론입니다. 그렇다면 고전적 가부장제를 통해 어떠한 것들이 전파되는가를 보겠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고전적 가부장제는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말자는 주장을 실제로 하기도 했죠. 그 구절을 보자면, “신이 모든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을 아담에게 부여했다.(창세기 제1장 28절, 사실 번역상 오류로 아담이 아닌 그들에게 권력 부여)”, “너의 욕망은 네 남편에게 존재할 것이며, 네 남편은 그대를 지배할 것이다.(창세기 제3장 16절)” 등이 있습니다. 우에노 치즈코가 정의한 여성 혐오 담론에 따르면, 사실 여성 혐오는 “너를 싫어해” 이런 것 아니잖아요, 억압하는 구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구조의 핵심은 남성이 주체가 되고 이 주체들의 연대를 위해, 여기서 연대는 사회계약이죠,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상화는 뭐고 주체가 뭔지 아시나요? 여기서 주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라는 뜻입니다.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대상들은 자신의 욕망을 가질 수 있나요? 대상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주체의 욕망을 따라야 합니다. 대상의 자립성이 없고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갖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남성의 욕망을 내가 그대로 따르는 거죠. 이리가레이 같은 경우, 여성들에게 주어진 모든 역할들은 어머니든, 딸이든, 창녀든 남성들의 욕망을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욕망을 잘 반영해주면 착한 거울이고, 좋은 대상인 것이죠. “너의 욕망은 네 남편에게 존재할 것이다.”라는 대목을 다시 보면 주인과 노예라는 그 구도 있잖아요, 그 구도가 여전히 사회계약론에도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필머 경의 논변들이 통한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아버지를 존경하라.(십계명)”를 보면 어머니 이야기가 아예 없죠. 캐롤 페이트먼은 이러한 것들을 지적하며 가부장제를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페이트먼에 따르면, 근대 가부장의 정치적 지배는 기존의 전통과는 조금 다르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에게 있다기보다는 아버지에게 있던 것이 아들이 빼앗아 오는 식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독점적으로 소유했던 여성을 갖게 되면서 자기 여성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죠. 그래서 근대 가부장제는 아들이 성교권을 가지게 된 것에서 확실시됩니다. 때문에 신은 아담에게 여성에 대한 지배권을 줬다는 말은 그 성교권을 강조하기 위한 말로, 정당화하기 위한 말로 써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왕은 여성을 임신시킬 수 있는 능력 덕택에 아버지로서 지배”, “남성이 생식에서 더 숭고하고 주된 행위자이기에 이브를 지배” 같은 이런 말들도 너무나 서슴없이 근대에까지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캐롤 페이트먼이 보기에 이러한 말들은 고전적 가부장제가 사회계약론을 거치며 여전히 성교권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가부장제로 가기 위한 기본적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교권은 정복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남성 시민들이 계약을 맺었다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국가는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을 보장해주어야 하죠. 그중에 하나가 결혼입니다. 일부일처제는 성문법적으로도 굉장히 확고하게 될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페이트먼은 “법률과 칼이 부인들의 영원한 노예 상태를 보장”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시민 사회에서 부인은 남편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자기 보호를 포기하기 됩니다. 그 당시 여성들에게 가장 큰 벌은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었습니다. 추방하면 다른 데 가면 되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다른 공동체도 안 받아줍니다. 그러면 거리와 숲속을 헤매야 되고, 거리와 숲속을 헤맨다는 것은 그 어떤 사람의 강간에 완전히 노출이 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여성들은 이 상태가 좋다기보다는 더 험한 꼴을 보기 싫으니까 여기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들을 수행하면서 남성의 보호에 만족하는 삶을 이어나게 되는 부분이 있는 거죠. 결국 가족을 대표하는 단 하나의 인격은 남성이었다는 겁니다. 때문에 19세기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 결혼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를 만들어내는 제도로서 해체해야 하는 것이었죠. 이미 19세기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68혁명에서 다시 나오게 됩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런 부분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로크는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즉, 여성도 주체이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명제에 의해 결혼법을 개혁하고 여성의 시민권, 더 나아가 여성의 낙태권에 대해서도 이미 동의를 한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내 몸의 나의 것이라는 명제, 언뜻 보기엔 되게 해방적인 것 같죠? 이것에 대해 조금 생각해 봅시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내 몸은 누구의 것이라고 소속시키는 소유의 방식 자체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대 시민 계약의 기준이 되었던 시민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 자,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자, 그것이 바로 원자론적 개인이었잖아요. 원자론적 개인이 국가에 권리 양도를 하면서 국가의 보호나 질서 체계를 받아들이지만 실제로 개인과 개인은 지속적으로 경쟁 상태입니다. 이는 더 많은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내 몸은 나의 것이고, 계약은 내가 아니다, 나는 모든 계약의 주체라고 주장한 것이 1세대 페미니즘의 핵심이긴 했는데 이것은 한계를 가집니다. 이렇게 주장하면 근대적 가부장제가 소유자로서의 개인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어요. 이 말은 나도 남성과 똑같이 해줘, 서로가 똑같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계속할 수 있는 개인이 되게 해줘라는 것까지만 가능하지 그 이상의 미래를 제시하는 데까지는 도달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캐롤 페이트먼은 내 몸은 나의 것이고 대상을 넘어 주체가 되는 것은 마땅하지만 소유 관념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 이 소유 관념이 가부장제를 탄생시킨 그 생산 양식과 매우 맞닿아 있다는 것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계약론, 가부장제, 자본주의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해방론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 안토니아스 라인은 어떻게 가능했나

 

앞서 언급한 사회적 조건을 고려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영화는 전쟁이 막 끝난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전쟁은 잉여생산물을 소유하기 위해 일어났는데, 바로 이 전쟁 때문에 원래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가 오히려 시민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모순적인 상황이 등장합니다. 안토니아가 왜 마을로 돌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애인 혹은 남편이 전쟁 중에 죽었으리란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영화 속 모계 사회적인 공동체 모델은 이러한 가부장 국가의 자기모순에서 출발했습니다. 크룩핑거라는 인물은 이러한 모순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하면서 존재는 가치가 없고 따라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식의 염세적인 주장을 펼치는데요, 저는 크룩핑거가 당시 시대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안에서는 여성을 확보하기 위한 또 다른 전쟁인 강간과 성폭력이 일어납니다. 두 여성을 강간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피터는 가부장 가족의 여성 억압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인데요, 주목할 점은 이 사람이 항상 군복을 입고 있다는 점입니다. 젠더와 국가의 교차지점이 보이시죠(웃음). 근대 국가가 출범할 때 시민을 보호해준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보호해주지 못하면서 더 이상 국가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 왔습니다. 모든 혁명은 이렇듯 사회적 약속이 깨질 때 출발하는 것 같아요. 안토니아가 탁월한 개인이어서 그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사회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주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곧바로 필요한 일들을 실천력으로 옮긴 것뿐이죠. 나는 아들이 필요하지 않고 남편이 필요 없으며, 더 나아가서 결혼도, 국가가 필요하지 않다. <안토니아스 라인>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 첫 번째는 자신이 대적하는 세계의 자기모순을 인식한 것입니다.

 

모계가 다시 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조건은 공동의 집과 땅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생산관계의 모델이 도시가 아닌 농촌인데, 커다란 땅에 많은 작물을 수확하는 대신 자급자족할 수 있는 규모로 꾸려나가죠. 또한 집과 땅을 공동의 재산으로 여겼기 때문에 도시에서 레테라는 여자 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도 곧바로 승낙해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엥겔스의 씨족사회 모델을 연상시키는 소규모 자급자족 농업과 공동재산을 채택했기 때문에 안토니아는 계급분화가 없는 모계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분쟁은 제한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에서 계급이 분화되기 때문에 일어나는데, 운동은 생산의 규모를 넓히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우리’끼리 싸워서는 안 되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을 체화하고 자라난 세대가 연대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토니아의 공동체에는 계급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근대 사회의 주인-노예 관계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이 함께 공동식탁을 이루어 평등한 위치에서 식사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죠.

 

4. 돌아온 자들은 누구였는가?

 

그렇다면 안토니아와 함께 한 인물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이야기해볼까요. 우선 안토니아의 어머니 - 안토니아 - 다니엘 - 테레사 - 사라로 이어지는 계보를 살펴봅시다. 먼저 안토니아의 어머니는 대상화와 피해자성을 벗어나지 못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근대 가부장제에서 남편의 외도라는 전형성으로 행복이 좌절당한 부인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데, 안토니아의 어머니에게는 이것이 우울증과 치매 증상으로 나타나죠. 이때 이 인물에게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재밌습니다. 안토니아가 마을로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가 집을 물려줬기 때문인데 이 계보는 안토니아의 어머니가 아닌 안토니아로부터 시작한다는 겁니다. 안토니아의 공통체는 대상화된 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이후에 논의할 ‘비체’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대상화라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자 비체로 인식되는 데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인 어머니는 여기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편 계보에 속한 다른 여성 인물들을 살펴보면, 안토니아는 농부, 다니엘은 미술가, 테레사는 수학 교수이자 음악가, 사라는 시인을 꿈꾸는 아이라는 면에서 모두 자기 욕망을 갖고 각자의 길을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토니아는 농부 바스와의 관계에 있어서 청혼을 거절하거나 손잡는 것을 뿌리치는 등 철저하게 자기 욕망에 따라 움직이죠. 이 사회가 여성 혐오적인 구조를 갖고 움직인다면 대상(여성)이 사랑받는 방식은 주체(남성)의 요구를 잘 받아들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때 남성 주체는 자기 욕망이 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여성을 싫어하겠죠. 안토니아가 ‘방탕한 년’이라는 욕설을 듣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안토니아의 어머니는 대상화된 존재의 방식으로 살았지만, 이 계보가 시작되고 나서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구하고 자각하는 주체의 모습이 출현합니다. 하지만 일단 이 존재방식이 정확히 말해 주체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인물들도 살펴볼까요. 크룩핑거는 밖에 나가지 않고,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이미 태어난 입으로 하는 모순적인 인물입니다. 모든 관계를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안토니아와는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디디는 지적 장애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조롱받는 인물입니다. 비록 기존의 질서에서 ‘정상’으로 간주되진 않지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조롱받는 대상의 위치를 벗어나는 사람이죠. 보름달이 뜨면 늑대 울음을 우는 미친 마돈나(Mad Madonna)라는 인물은 이미 종차라는 경계를 넘나드는 분이에요. 이교도라고 얘기되고, 달을 보면서 예식을 하는 것만 같죠. 기존의 질서를 위반하는 사람입니다. 신부의 경우 성당을 뛰쳐나와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고 다니죠. 레테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져 12명의 자식을 낳는 모습을 보입니다.

 

디디와 사랑에 빠지는 미친 입술(Loony Lips)이라는 인물도 재밌는 게, 바보 취급을 당해서 아이들에게 놀림받는 상황에서 안토니아의 도움을 받잖아요. 그때 주인이 따라오라고 했는데 그 명령을 거역하고 너무 가뿐하게 안토니아에게 갑니다. 대상은 주체의 욕망에 매우 잘 길들여져 있는데,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잘 길들여지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어요. 언제든지 그 질서체계를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들이 안토니아와 함께하고 있는 겁니다. 한편 농부 바스는 이주민이에요. 이미 다른 곳에 있다가 경계를 넘어온 사람이죠. 피터가 자신의 동생인 디디를 성적으로 능욕할 때 디디를 도와주기도 합니다. 올가는 조산원이자 장의사로 일하며 삶과 죽음을 동시에 돌보죠. 또 다니엘은 성당에 가서 죽은 할머니가 관에서 일어나 노래 부르는 장면을 목격하는데, 이처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같이 본다는 점에서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질서체계 안에 편입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이 모든 인물을 ‘비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체’(abject)란 1)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 2) 경계와 안팎을 넘나드는 것 3) 흐르는 것, 고체화되지 않기에 어떤 규정이나 언어로도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프로이트의 용어를 가져온 것인데요, 상징계(사회적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규칙에 종속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기 안의 무언가를 버리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힘들지만 버리고 외면했던 것, 그렇지만 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친근했던 것을 일컫는 개념이 바로 비체입니다. 비체는 주체도 대상도 아닙니다. 주체는 질서 지워져 있고 경계가 뚜렷한 존재죠. 특히 자신의 몸에 하나의 오점이나 구멍도 없다는 태도를 취하며, 매우 논리적이고 독립적인 사유를 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반면에 대상은 주체에 의해 대상화된 존재방식이라면, 비체는 이와 달리 기존의 주체에 의해 잘 대상화되지 않는, 한 단어로 포섭되지 어려운 존재방식을 뜻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상은 없고, 주체에 의한 대상화만 있을 뿐입니다. 주체 역시도 대상이 질서체계를 완벽하게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체는 순종적으로 길들이려고 해도 잘 대상화되지 않는, 즉 대상이 아닌(a-bject) 존재인 거죠.

 

중요한 것은 비체가 놀림과 조롱을 당하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이 놀림은 대상일 때 더 많이 당하고, 막상 비체성을 드러내는 순간 주체가 공포를 느낀다는 겁니다. 주체는 허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데, 비체는 잘 이해되지도 않고 개념에 잡히지도 않는 거죠. 그래서 주체는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개념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상황에서는 두려움이 없지만, 어떤 비체성을 발휘하는 군집이 있을 때 이것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능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래도 대상화되지 않으면 배제, 즉 죽여 버리고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마녀사냥입니다. 주체의 전략은 대상화 혹은 배제인 것이죠. 안토니아는 겉으로는 평화로운 것 같지만 기존의 질서에서 보면 말 안 듣는 사람, 말도 안 되는 사람이에요. 안토니아가 정착할 때 마을 사람들이 안토니아를 어떻게 받아들였다고 나오느냐면 ‘송장이 송장 보듯이’, ‘신을 보는 듯이’ 받아들였다고 해요. 죽음과 관련된 것은 다 비체인데, 재밌는 점은 신도 비체라는 거죠. 안토니아는 늘 대상화의 위협에 시달리지만 끊임없이 자기 욕망을 갖고 자기만의 규칙을 만들면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질서체계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토니아는 그래서 무서운 사람이고,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런 이유로 저는 <안토니아스 라인>의 공동체가 비체들이 모여서 이룬 공동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5. 긍정적 존재조건으로서의 비체

 

정리하면, <안토니아스 라인>은 비체들이 모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산양식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비체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는가하는 것입니다. 비체는 예측할 수 없고, 어디서 출현할지 모르기 때문에 비체와 비체는 서로에게 불투명한 만큼 서로에게 공포감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페미니스트끼리도 비체와 비체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처한 물적 조건이 씨족사회가 아닌 자본주의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거나 연대를 도모하는 일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동체는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요?

 

우선 저는 비체 공동체를 위해서는 적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모든 사람과의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체는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지만 질서를 교란하는 데 가담하기 때문에 질서를 보수하고 유지시켜서 이득을 얻으려는 자에게는 분명 위협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한편 인간은 누구나 조금씩은 비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은 꽉 짜인 질서만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체는 인간 존재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나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은 사회적 질서에 들어가기 위해 삶의 존재조건이었던 것 하나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해요. 크리스테바는 이를 코라(chora)라고 명명하며 비체성이 새로운 의미와 변화의 저장고임을 피력하는데요. 시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 즉 옹알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은 비체성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비체성이 늘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그럴 때만이 비체 공동체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체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대신 긍정적으로 재전유하는 순간, 변화를 위한 새로운 행위자성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때 공동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비체가 불안한 나머지 스스로 주체가 되려고 하는 것이겠죠. 사회를 뚜렷하게 질서 지우고 사람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 하지만 <안토니아스 라인>은 그런 불안한 우리, 비체성을 가진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삶의 조건이며, 따라서 우리는 인생 안에서 춤을 출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비체성을 인정하고 그것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영화의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물적 생산조건이나 미래 사회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운동이 정당화되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일상에서의 대중운동을 넘어서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많이 시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운동을 함께 시작했던 분들이 이미 고민하고 이론화시키고 있는 부분이기도 할 텐데요, 지금을 깊이 있는 논의를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기로 받아들이고, 생산조건과 틀 다시 짜기, 그리고 비체들 간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정서적, 물질적 토대에 대한 고민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강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취재 │ 이예진, 정현경 루키

 
사진 │ 나재훈 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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