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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NeMaf 2025 마스터 클래스 <올파의 딸들>
김원정 조회수:880 121.170.151.110
2025-08-13 15:11:56

« 안티고네의 주장: 미디어, 폭력, 윤리에 관하여 »

올파의 딸들 : 마스터클래스

 

일시 : 2025년 8월 12일 (화) 18:30

패널 : 정혜욱 교수

모더레이터 : 김지희

 

 

김지희: 네마프 영화제의 마스터 클래스에 오신 여러분 올파의 딸들을 함께 감상하고 또 정혜욱 교수님의 강연을 함께 뵙게 돼서 너무 반갑습니다. 잘 들리시나요? 튀니지의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인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의 영화를 정혜욱 교수님께서 렉처를 맡아주신다고 들어 알고 있었는데 모더레이터 역할을 맡게 되어 너무 영광이고요. 또 정혜욱 교수님만큼 이 영화 감독과 잘 맞는 분이 계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왔습니다. 정혜욱 교수님께서는 한국의 페미니즘을 연구하셨고 특히 주디스 버틀러의 사상들을 매우 깊게 연구해 오셨습니다. 정신 분석 이론과 현대 비평 이론에서 중요한 글과 논문을 여러 해 발표해 오셨습니다. 권력에 길들여지지 않은 학문적 언어와 삶을 계속해 오셨다고 저는 늘 생각해 왔고 존경을 해오고 있습니다. 한 명은 감독이고 한 명은 학자이신데 두 분의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의 마스터 클래스가 매우 기다려집니다. 정혜욱 교수님의 연구와 글에서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의 작품 세계와 맞닿는 지점을 저는 여러 군데 상상을 해왔고 또한 오늘 관객분들이 어떤 지점들을 생각해 오셨을까 매우 궁금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께서 준비해 오신 것이 많은 만큼 저는 여기서 PPT를 넘기는 역할로 물러나고요. 또 이따 또 질문을 관객들께서 하시면은 옆에서 같이 보조를 하겠습니다. 교수님 발표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혜욱: 안녕하세요. 부산에서 올라온 정혜욱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초청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요. 제가 사실은 튀니지 영화가 처음이라서 이렇게 계속 반복해서 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이야기 자체가 어떤 건지를 잘 몰라서 제가 좀 배경을 좀 찾았습니다. 이렇게 지금 제일 먼저 찾았던 것은 일단 감독이 누군가라는 것부터 먼저 찾았습니다. 주로 페미니즘 관련해서 이제 작품 활동을 굉장히 많이 하시는 분이고요. 그리고 주요 작품은 이제 튜즈의 샬라라고 해서 여성들을 칼로 공격한 남자를 찍은 영화 다음에 미녀와 개들이라 성폭행을 다룬 영화입니다. 개들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고 영어권에서는 늑대들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리고 그다음에 자신의 피부를 판 남자라고 해서 난민 문제를 다루는 이런 작품이고 가장 최근의 작품이 우리가 오늘 감상했던 올파의 딸들이라는 이 작품이고요. 칸 영화 경쟁 부문에 초청이 되었고요. 그리고 다큐상인 레이어 도르를 공동 수상하셨으며 이후 아카데미 장편 영화 장편 다큐상 후보에 올랐다고 이렇게 이제 알고 있는 굉장히 좋은 영화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보면서 제가 튀니지의 역사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아마도 튀니지에서 평범하고 아마도 좀 가난했을 거예요. 엄마가 청소부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남편과는 이혼을 한 상태고요. 올파는 그리고 또 남편과는 이혼한 상태고 그래서 이제 4명의 딸을 혼자서 키우고 있는 이 올파라는 여인이 있는데 이 여인의 딸 4명 중에 첫째와 둘째가 이제 지하드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서 아주 평범하게 알고 있기는 그냥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합류했다, 이렇게 하면 굉장히 이해가 쉬울 거예요. 근데 테러리스트라는 말은 안 쓰죠. 그죠? 여기서는 이슬람 국가라는 얘기를 쓰는 거죠. 그게 훨씬 더 중립적인 단어이기도 하고요. 테러리스트라는 이런 규정 자체가 굉장히 서구적인 규정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제 이 두 명의 딸이 그러니까 ISIS에 합류하고 난 뒤로 이 가족 자체가 사회에서 굉장히 따돌림을 당하고 그리고 사회에서 거의 호모 사케르와 같은 거의 사회에서 하나의 시민으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말 할 어떤 권리도 없는, 사회에서 굉장히 따돌림을 받고 있는 가족이었던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주로 이제 남자가 90%고 여자가 10% 정도 된다 라고 하는 ISIS에 왜 두 딸들이 합류를 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이제 이 영화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벤 하니야 감독은 TV에 등장한 올파가 이제 튀니지 정부가 자기 딸들을 보호해 달라고 했는데 정부가 해주지 않았다라고 막 얘기를 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래서 다큐를 제작했다고 하죠. 처음에는 배우를 쓸 생각은 없었고 관찰 다큐멘터리로서 그냥 기획되었대요. 근데 관찰 다큐멘터리 가지고는 이야기를 다 담을 수 없다고 얘기를 해가지고 이제 배우를 쓰게 되는 거예요. 사라진 두 딸에 대한 배우 그리고 이제 남자로 나오시는 이제 남자 배우가 한 명 있는데 그 남자 배우는 원래 자기 전 남편 역할 그다음에 나중에 남자친구 역할 나중에 경찰 역할 그다음에 뭐예요? 자기 딸의 남자친구 역할 모든 역할을 혼자서 다 담당하고요. 그리고 이제 올파도 감정적으로 너무 힘든 경우에는 여자 배우가 대체를 하는, 그러니까 다큐와 영화가 일종의 섞여 있는 이런 하이브리드 영화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올파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면 올파는 그렇게 이제 살았고, 주인공이라고 할 수가 있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고프란과 라흐마가 첫 째와 둘 째 딸이고요. 이제 고프란과 라흐마는 배우들이 재현을 해서 이 아이들의 부재를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다음에 셋 째와 넷 째가 에야와 타이시르인데 이들은 이제 재연 배우 없이 직접 출연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합니다.

 

그다음에 이 집은 제가 이제 굉장히 궁금했던 게 올파가 청소부 일을 하면서 굉장히 어렵게 애들을 키웠다라고 얘기가 계속 대사에서도 나오는데 사실 튀니지의 집이 참 공간이 굉장히 넓었어요. 그렇게 해서 이 집에 대해서 감독하고 인터뷰한 것을 읽어보니까 집은 가난 때문에 이 아이들이 ISIS에 합류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집은 별도의 세트 공간으로 실제 집과 유사하게 만들었지만 조금 중립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이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 집에서 촬영할 경우에 이게 정작 어린 딸들에게 심리적 부담이나 상처가 될 수 있으므로 이를 피하고자 세트장을 활용했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의 집 자체의 공간도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만들어서 공간 자체가 현실과 허구 사이의 중간 지점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튀니지가 어디 있는지 자꾸 헷갈려서 구글 맵에 들어가봤는데 튀니지는 여기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알제리와 리비아의 가운데 있고요. 그리고 이 튀니지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리비아라든가 다른 알제리하고 이제 튀니지 같은 경우에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서 굉장히 이슬람 국가라기보다는 세속적인 국가로서 됐다고 해서 간단하게 튀니지의 역사를 살펴보면요. 1881년에서 1956년까지는 프랑스 식민지로 있었고요. 그래서 원래 주로 종교가 이슬람이었는데 근데 프랑스 식민지를 받으면서 굉장히 세속적 국가로 변신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1956년에 독립을 해가지고 이렇게 하비브 부르기바 같은 경우가 거의 30년 동안 집권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30년 동안 집권이 가능했던 이유가 이 사람이 이슬람의 역량을 굉장히 억제하고 굉장히 친서구적인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굉장히 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30년 동안 집권을 할 수 있었다고 그래요. 그리고 이 사람은 이제 일부다처제, 4명까지 결혼을 할 수 있는데 이런 일부다처제도 못하게 하고 결혼도 강제 결혼은 안 되고 우리는 너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상호 동의가 있어야 결혼이 되고 그다음에 혼인 연령도 너무 어리면 결혼을 못하게 하는 등 이런 식으로 이제 굉장히 여성 인권을 강화하는 대륙법을 도입을 해서 종교의 법에 따라서 처벌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 거죠.

 

그리고 나서 하비브 부르기바가 이제 물러간 게 아니고 강제로 정권이 바뀐 건데 그다음에 들어선 사람이 벤 알리입니다. 영화 속에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벤 알리는 대사 속에 몇 번 언급이 됩니다. 벤 알리 시절이 훨씬 더 좋았다라고 대사 속에서 언급이 되는데 이 벤 알리는 1987년에서 2011년까지 벤 알리가 쿠데타로 집권을 하게 돼 가지고요. 벤 알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집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구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이 부패하지 않아서 오래 집권을 했다기보다는 서구나 미국이나 이런 쪽에서는 이슬람 쪽의 정권이 집권하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쨌든 세속적인, 종교와 관계없는 정권이 집권하는 걸 굉장히 원하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이 그랬기 때문에 이제 정책 자체도 그렇게 편 것 같아요.

 

이제 베일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베일 자체가 히잡도 있고 니캅도 있고 브루카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착용하기 위한 것을 완전히 금지하고 국가 주도의 세속주의를 편 거예요. 그런데 이제 튀니지 쪽에서는 불만이 많았던 거죠. 그러니까 히잡이든 니캅이든 본인의 자유에 의해서 착용하는 게 맞는 거지 국가가 이것을 완전히 쓰지 못하게 금지하는 게 맞는 거냐 해서 불만이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까 이 정권이 물러나고 난 다음에 2011년에 아랍의 봄이라는 아랍에서 오랜 부패한 정권을 몰아내는 시위가 아랍 전체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거죠. 아시는 분은 다 아실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그 아랍의 봄 시절에 이제 벤 알리가 완전히 물러나고 정권이 완전히 붕괴가 되고 아랍의 봄이 오면서 민주화가 진행이 됩니다. 그러니까 독재 정권 자체가 없어진 거죠. 근데 아랍의 봄이 막 민주시위가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 뉴스에도 나고 영미권 유럽 프랑스 이쪽에서는 아랍에서 독재 정권을 몰아낸다고 굉장히 서구에서 부풀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서구나 이런 아주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설 것이라고 굉장히 기대를 했지만 하지만 아랍의 봄 민중항쟁이 일어나고 난 그 뒤에는 정치적 혼란이라고 그냥 쓰이기는 했는데 아마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서 정치적으로 굉장히 혼란하고 그다음에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하니까 급진 이슬람주의가 부상하기 시작을 해가지고 특히 튀니지에서 ISIS에 가입하는 경우가 굉장히 늘어났다고 합니다. 튀니지가 이제 보시면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터키 러시아 이렇게 비교를 했을 때 인구 대비 최고 6천 명 정도가 가입했다고 하니까 굉장히 아주 많은 인구가 튀니지에서 ISIS로 가입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브루카 같은 경우는 아프가니스탄이 브루카를 입음으로써 여인들에게 브루카를 강요하면서 굉장히 익숙해진 거죠. 중간에 그물망 같은 게 쳐져 있는 게 브루카고요. 그다음에 이제 차도로 같은 경우 코 정도까지는 드러내는 것 같고 히잡은 그러니까 스카프 형식으로 얼굴 자체는 드러낼 수 있는 이런 형식이라고 한다면은 니캅은 영화에서 보셨겠지만 눈만 딱 드러내는 이런 형태죠. 그리고 이제 문화권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페모네셔널리즘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페미니즘 관점에서 조금만 보충해서페미니즘의 역사도 한번 살펴봐야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1990년대까지는 페미니즘이 젊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고 전 세계적으로도 긍정적인 단어였다고 제가 기억하고 있어요. 그 시절을 제가 살아왔으니까. 근데 이 페미니즘이라는 게 굉장히 이미지가 나빠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냐면은 2001년 911 직후부터라고 할 수가 있죠. 그런데 그때 이제 부시가 미국의 대통령이죠. 아프간하고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그 부시 대통령이 이제 아프간을 공격하면서 쌍둥이 빌딩을 부순 테러리스트가 아프가니스탄에 숨어 있다라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이걸 공격을 하면서 전쟁의 명분이 부족하니까 그때 뭐라고 얘기를 했냐면은 부시 정부가 무슬림 여성을 구원해야 될 대상으로 정의하고 이를 통해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전쟁에 대한 군사 개입을 합리화했다는 거죠. 그래서 이제 특히 부시 부인인 로라 부시가 라디오 연설에 나와가지고 우리는 무슬림 여성이 망가진 인권을 굉장히 구원해 주고 그들에게 자유를 부여해야 할 의무가 있고 이게 서구의 의무다라는 식으로 이제 연설을 한 거예요. 그 연설을 하면서 무슬림 여성을 무기력한 피해자로만 정의하고 이제 서구의 시선으로 타자화시키고 대상화시키기 시작한 거죠. 그러니까 이때부터 페미니즘이 어떤 개념이 됐냐면 페모네셔널리즘이라고 페미니즘과 내셔널리즘이 결합해 가지고 페미니즘이 부시의 군사 행동하고 전쟁을 치는데 하나의 도구로서 페미니즘이 이용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이렇게 페미니즘 자체가 이제 사람들이 특히 이슬람권에서는 뭐냐 하면은 페미니즘이 여성의 권리만을 신장하고 싶으면 서부에서만 그렇게 하든지 근데 제3 세계에 개입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데 그것이 하나의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서구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도구가 아니냐라는 혐의를 쓰기 시작을 했었던 거죠. 그래서 2004년이 되면은 프랑스, 독일, 미국도 굉장히 그때 이 서구에 있는 철학자들이 히잡 가지고 얘기가 핫하게 되었었는데 어쨌든 프랑스는 공립학교에서 학생들의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를 시켜 그다음에는 공공장소에서 얼굴 전체를 가리는 니캅과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고 그다음에 히잡이나 니캅을 쓰는 사람은 무조건 테러리스트다 이런 식으로 정의를 하기 시작한 거죠. 이렇게 하면서 이슬람 진영에서는 페미니즘이 정치적 도구가 되고 이렇게 그러다 보니까 페미니즘이 전 세계적 연대를 구축하지 못하고 서구 페미니즘은 무조건 국가의 도구이기 때문에 몰아내어야 할 어떤 것으로 개념 정의가 되는 거죠. 그래서 그다음으로 넘어가시면 이스라엘 페미니스트는 이제 페미니즘과 국가 폭력이 결합하는 거는 결코 되지는 않는다라고 얘기를 하면서 베일 자체의 정치학이 있다는 거죠. 베일을 쓰는 것 자체가 서구화에 대한 저항일 수 있다라고 이제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설득력이 있는 게 사실은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식민지로 있었을 때는 여자들이 굉장히 자유롭게 살았단 말이에요. 여자들이 직업도 가질 수 굉장히 자유롭게 자랐어요. 제가 예전에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 가지고 글을 쓰면서 이슬람의 페미니즘의 상황을 봤는데 근데 이게 소련이 물러나고 탈레반이 다시 집권을 막 하고 있었을 때도 그때도 너무나 여성들이 고통스러워서 전 세계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이제 브루카를 입는다는 뜻은 여자는 절대로 직장을 가져서는 안 되고 여자는 직장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예를 들어서 어떤 집에는 딸들만 있어가지고 여자들은 직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남자 형제가 없는 집에서는 완전히 그 집은  굶어야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여자 자매들만 있는 경우에는 브루카를 입는다는 것은 남자의 동행 없이 바깥에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법도 같이 시행을 한 거죠.

 

그러니까 이제 바깥에 나갈 수도 없고 그리고 이제 아기를 낳을 때도 여자가 직업을 가지면 안 되고 남자한테 몸을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여자 산부인과 의사가 있어야 아기를 낳을 수가 있는데 애기를 그냥 집에서 자연 분만해야 되는 거죠. 절대로 아파도 산부인과 의사 자체도 여자 의사는 전부 다 집에 다 들어가야 했고 직장을 다 잃어야 했기 때문에 여자는 그런 돌봄의 바깥 속에 있어야 되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러니까 아프간 페미니스트들이 국제사회에다가 엄청나게 호소를 한 거예요. 우리 이런 상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여 달라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때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경우에는 뭐예요? 소련보다는 이슬람 정권이 좋다는 거죠. 소련이 뭐예요? 아프가니스탄까지 이렇게 세력을 뻗치는 게 반공주의 때문에 너무나 싫었던 거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목소리를 완전히 외면을 하고 있다가 못 들은 척하고 있다가 언제 뭐 그런 얘기를 했느냐 하고 있다가 갑자기 911이 터지고 나서 아프간을 공격하고 싶어지니까 이슬람 여성들이 얼마나 불쌍하냐라고 얘기를 하면서 아프간 여성들을 아프가니스탄에 데리고 와서 타임지 같은 데 보면은 이제 히잡을 벗기는 거죠. 그러니까 여성의 얼굴을 타임즈의 표지 인물로 실으면서 이제 그런 표지물로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에게 이렇게 인권 탄압을 해서 되겠느냐라고 서구들이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왜 옛날에는 그렇게 호소할 때는 얘기 안 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이렇게 하느냐라고 얘기하면서 이제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이 전부 다 베일 옹호, 히잡 옹호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된 거죠. 그런데 그때 이제 벤 알리가 집권하고 있었던 시절이에요.

 

이 시절이 그래서 튀니지에 있는 수많은 여성들은 여기에 하나의 저항의 표시로서 히잡을 쓰고 싶어도 그 정권에서 히잡 쓰는 걸 아예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던 거죠. 근데 그러고 나서 이제 아랍의 봄이 있고 나서 종교의 자유가 몰아쳐 오니까 뭔가 반발이 굉장히 심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전에 히잡이나 부르카를 모조리 금지했던 금지에 대한 반발로서 사람들이 막 히잡을 쓰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다음에 시위가 일어나고 나서 정권의 공백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나라의 경제도 굉장히 흔들리고 밥 먹고 먹고 살기도 굉장히 힘들어지니까 특히 이제 남자들 같은 경우에는 직장도 없이 그러니까 돈을 벌지도 못하고 계속 굶고 이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멸시 이런 것을 견뎌내야 되니까 하나의 자기의 번듯한 지위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멸시 이런 것을 피해서 전부 어디로 가냐면 ISIS로 가는 거예요. ISIS에서는 최소한 인정은 획득할 수 있으니까요. 전사고 과감하게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뭐예요? 서구의 제국주의에 반해서 내 몸을 한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 인정을 획득하기 위해서 가는 사람이 튀니지에 정말 많았다는 겁니다. 이제 이걸 배경으로 해서 영화 속으로 들어가야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수많은 페미니스트가 많이 있는데 집행위원장님께서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이제 주디스 버틀러를 중심으로 얘기를 해달라 해서 주디스 버틀러를 중심으로 논의를 뽑았습니다.

 

주디스 버틀러가 이제 911이 지나고 나서 911 직후에 쓴 책이 젠더 허물기 하고 전쟁의 프레임들이라는 책 그다음에 위태로운 삶 이런 저작들을 적었는데 거기서 이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페미니즘이 과연 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주디스 버틀러가 제일 마지막 거에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서구의 중산층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이익 단체라면은 그것은 철학도 될 수 없고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그냥 이익 단체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페미니즘이 여성만의 권익을 옹호하거나 여성만의 권리의 확대를 위한 사회 운동이 되어서는 안 되고 페미니즘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 인권을 아우르는 이런 철학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을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하나의 철학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무슬림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그러니까 히잡만 쓰면 테러리스트라고 얘기했을 때 인간적 위상을 얻지 못한 사람들, 사회적 규범의 바깥에 내몰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이 취약하고 위태로움을 전부 다 망라할 수 있는 이런 큰 개념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 사람이 그러니까 주디스 버틀러라고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주디스 버틀러 같은 경우에는 인간이 아이를 처음 딱 낳았을 때 그 아이의 탄생을 정말로 축하하는 것은 그 아이가 언젠가 죽을 때, 죽음이 없다면 그 아이의 탄생을 축하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이런 죽음이라는 애도 가능한 삶으로 인간으로 다 만들어주자라고 주장한 게 주디스 버틀러의 아주 아주 기초적인 개념입니다.

 

 

제가 영화로 넘어가야 되기 때문에 조금 단순화시켜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다음으로 넘어가시면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반복해서 제가 굉장히 고민을 했던 게 이런 거죠. 제가 이제 떠올린 책이 뭐냐 하면은 윤리적 폭력 비판이라고 우리나라에서 번역이 됐는데 이게 원제는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거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원재예요. 근데 이제 우리는 윤리적 폭력 비판으로 이제 번역이 됐는데 독일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에 아마 윤리적 폭력 비판으로 붙인 것 같아요. 근데 이게 이제 주디스 버틀러의 핵심 저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디스 버틀러 하면 젠더 트러블을 핵심 저작으로 생각하거든요. 근데 이제 저 같은 경우에는 이게 핵심적인 저작이라고 생각이 되는 거는 이제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중에 가야트리 스피박이라는 분이 계세요. 이분이 얼마 전에 일주일 전인가에 한국에 오셨죠? 한국에 오셔서 강연을 하셨는데 이 가야트리 스피박이라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의 핵심적인 개념은 서번턴은 말할 수 없다. 서벌턴이 뭐냐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는 직업이라도 있으니까 프롤레타리아가 된 거란 말이에요. 근데 서벌턴은 프롤레타리아의 지위를 얻지도 못하는 거예요. 얻지도 못한 그 지위, 프롤레타리아처럼 함께 모여서 시위를 할 수도 없고 직업을 가지지 못한 이런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가들이 대변해 줄 수는 있지만 스스로 아무리 말해도 소음처럼 들리지도 않는다는 거죠. 그다음에 예를 들어서 이 사람이 제일 많이 얘기했던 게 인도의 사티죠. 인도의 과부들인데 인도의 과부들 중에 전통적인 관습 중에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남편이 죽으면 무조건 따라 죽어야 되는 이런 과부들이 있었던 거죠. 이러한 과부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따라 죽어야 하는 과부들은 실제로 목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는 있다손 치더라도 그 사람들이 어떤 얘기를 나와서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가 않고 서구 지식인들이 그 여자들을 대변하는 이야기만 들린다 혹은 인도의 전통으로 자기 남편을 따라서 스스로 죽는 거를 그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서구 지식인들이 말하는 거죠. 그다음에 우리의 전통이 아름다운 전통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을 때 실제 이렇게 자기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해도 그 말이 들리지가 않고 그냥 소음처럼 들린다는 거, 근데 이게 스피박의 얘기라면 주디스 버틀러의 얘기는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가 왜 중요하냐면요. 예를 들어서 한 대학의 교수고 집안의 아버지고 어머니고 그다음에 어느 대학교 학생이고 이런 식으로 자기를 설명할 수 있는, 내가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고 국회의원이고 이런 사람들은 규범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하지만 이제 우리가 많이 듣는 소리가 명절 때 시골에 갈 때마다 너 왜 결혼 안 하고 사느냐 그다음에 결혼을 했을 때 너는 왜 아기가 없느냐 계속 묻는 것은 사실 팩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왜 규범 속에 들어오지 않느냐를 묻는 거죠. 규범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설명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내가 결혼을 안 하고 살아야 되는지 특별히 꼭 이유가 있어야 결혼을 안 하는 건 아니잖아요. 결혼을 어쩌다 보니 안 할 수도 있는 건데 그거는 결혼이라는 게 사회적 규범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상, 가부장제라는 게 바깥에 존재하는 이상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해서 설명해야 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애는 공부를 쭉 해서 대학을 가야 되는데 대학을 스스로 안 가는 애가 있다면 왜 안 가느냐 계속 물으니까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설명해야 된다는 거죠.

 

근데 이 설명이 어디서 나오고 왜 설명을 해야 하냐면 규범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설명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디스 버틀러 같은 경우에 스피박은 서벌턴은 말할 수 없다라고 얘기를 해버리고 지식인들이 그 사람들을 대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얘기를 했지만 주디스 버틀러 같은 경우에는 그게 아니다, 설사 부족하고 모자라고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규범의 언어를 빌려야만 나를 설명하는 걸 할 수 있는 거죠. 그니까 문법에도 맞아야 하고 그다음에 현재의 법 체제에 맞는 언어로서 나를 설명할 때만이 상대에게 전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설명할 수 없는 나, 규범의 바깥에 있고 법의 바깥에 있고 법의 경계선에 처해 있는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설명해야 되는데 어카운트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카운트가 숫자라는 뜻이고요. 어카운트는 회계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숫자는 예를 들어 숫자만 쫙 나열을 하면은 우리가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어요. 아무리 많은 숫자가 있다 치더라도 그것을 회계를 통해서 이거는 수입이고 이거는 지출이고 그래서 적자가 났는지 흑자가 났는지 설명해 주는 게 어카운트란 말이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일종의 집에 있는 가정 주부에게도 해당될 수가 있는 거고요. 직장이 없는 사람들, 우리가 얘기하는 사회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설명을 해야 되는데 그 설명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이 불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 불완전하나마 이 설명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수행성이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 수행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 이 책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이걸 얘기를 한 것은 안티고네만 가지고는 이 영화가 설명이 잘 되지가 않는 거예요. 근데 올파의 딸들을 보면서 올파는 결국 자기 딸을 테러리스트로 보낸 엄마가 무슨 할 말이 많아서 이렇게 나와서 떠드느냐 국가를 비난할 자격이나 있느냐는 얘길 듣고 그리고 애들은 학교에서 왕따가 되고 그다음에 그 가족들 외에는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이 완전히 호모 사케르처럼 그냥 완전히 동떨어져서 사회와 어떻게 교류도 전혀 없이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가족에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그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이 영화 자체가 바로 주디스 버틀러가 얘기하는 giving an account of oneself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런 수행성의 한 측면이 아닐까라는 데 있었던 거죠. 근데 이제 여기서는 이 영화를 제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리뷰를 하는지 쭉 찾아봤더니만 이 영화에 대한 비판적 입장도 있어요. 왜냐하면 이 영화 자체가 히잡이나 니캅을 쓰게 되면서 점점 급진화 되어 가지고 애들이 ISIS에 합류를 하게 되고 그리고 이제 베일을 써가지고 테러를 저지르고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고 이게 전부 다 히잡과 니캅이라는 베일 때문이다라는 메시지가 너무 강해가지고 이것을 잘못 보면 굉장히 친서구적 관점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이런 비판도 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 같고요. 그리고 이제 굉장히 옹호적 입장이 그다음으로 넘어가시면 제가 아까 얘기했었던 아주 긍정적인 입장이 영화는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장이 될 수가 있었고 영화 자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과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배우가 대신 재현해 주면서 이런 극적인 장치를 통해서 그 사람들이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영화 자체가 수행성의 실천 장소라는 측면에서 굉장히 의의가 있었던 작품이 아닌가라는 관점에서 한번 접근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이제 중동이라든가 사실은 이 가정 내 폭력은 굉장히 심각했었던 것 같아요. 제가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었을 때도 여자가 여자한테만 폭력을 심각하게 가하는 게 아니고 남자가 남자한테도 이 폭력 자체가 너무나 일반화되어 있고 바로 이웃 나라에서는 계속 전쟁 하고 무법 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에 폭력이 상당히 일상화되어 있는 곳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엄마인 올파 같은 경우에는 여자가 강하지 않으면 이 아이들이 다 어디 나가서 성폭행도 당한다며 아주 정절을 잘 지켜서 순응적인 주체를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굉장히 딸들을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는데 이 폭력을 행사하는 게 너무 지나치다 보니까 애들이 나쁜 쪽으로 빠지게 됐다라는 이런 쪽의 관점도 있기는 있는데요. 그래서 어쨌든 이 사람은 남자처럼 강해야 된다고 계속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회 자체가 굉장히 가부장적이었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디스 버틀러의 안티고네의 주장과 아까 윤리적 폭력 비판(giving an account of oneself)하고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연결을 했는데요. 그다음에 이제 이 안티고네는 그러니까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안티고네는 그냥 단순히 크레온에 저항하는 저항의 아이콘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 안티고네는 항상 얘기를 하기를 아이는 내가 계속해서 낳을 수 있지만 오빠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오빠를 반드시 묻어줘야 된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근데 그 말을 듣고 있으면 안티고네가 왜 저 말을 하는지를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기가 죽는 건 슬프지 않은 건가 하는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 주디스 버틀러는 그 지점에서 뭐라고 설명을 하느냐 하면은 이 안티고네가 크레온이라든가 그 당시의 폴리스 그리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자기 자신을 설명해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규범에 맞는 언어 문법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가 없고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면 저항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가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를 억압하고 있는 규범의 언어를 빌려야 한다라는 얘기를 이제 안티고네의 마지막 장에서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그다음으로 넘어가시면 강제적 규범에 저항하기 위해서 더 강력한 규범 속으로 들어가는 딸들, 그러니까 올파는 아마도 결혼하기 전에 성적 학대를 당한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의 결혼 생활이 결국 이혼하고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가 돼서 막 학대하고 이런 아주 힘든 삶을 살았는데 딸들은 이런 성적 학대를 당하지 않는 정숙한 딸로 키워서 좋은 데 시집을 보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러니까 딸들이 다리 사진을 찍으니까 이것 가지고도 야단을 치고 머리 염색한 거 가지고도 거의 죽을 정도로 때리고 그렇죠. 남자친구하고 사귀는 것도 절대로 용납 못하고 이런 식으로 너무나 엄격하게 딸들을 구속하고 딸들에게 그러니까 가장 강력한 가부장적인 힘을 행사를 하는 거예요. 이게 튀니지의 전체적인 분위기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튀니지의 맥락에서 딸들은 히잡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자신을 억압하는 어머니에 대한 저항 도구로서 히잡을 쓰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규범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규범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히잡이나 니캅을 썼을 때는 니캅이 어깨선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그다음에 이런 얘기도 있죠. 이슬람권에서는 발을 소리 내어서 신발을 끌면 그게 너무나 남성의 성욕을 자극하기 때문에 브루카를 입고 있을 때도 발을 끌면서 걸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까 고프란은 사뿐사뿐 발자국 소리도 안 나게 걸었다는데 그렇게 이제 딸들이 엄마한테 딸들은 니캅을 쓰고 이렇게 이슬람의 법을 잘 지키는데 엄마는 저게 뭐냐라고 얘기를 하면서 엄마에게 저항하는 장면들이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엄마는 그런 식으로 하면 나는 일도 못한다라고 얘기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이슬람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냐 일하는 게 더 중요하냐라고 막 따지는 이런 장면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슬람을 통해서 자신들의 어머니가 자기들보다 덜 무슬림적일 거라고 비난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히잡은 딸들이 선택한 저항의 도구이자 자신을 억압하는 어머니를 다시 억압하는 수단으로 기능을 해요. 이건 이제 제 말이 아니라 감독 인터뷰에서 따온 얘기고요. 딸들의 저항은 근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더 강력한 규범에 대한 복종의 어휘를 통해서만 전해진다는 거죠. 그래서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강력한 규범에 복종을 하다 보니까 결국은 더욱 강력한 규범에 대한 복종을 하게 된 것이 결국은 ISIS에 가담하는 것으로 이제 끝이 나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그렇다면은 더 강력한 규범으로 들어가는 것이 과연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는 수행성인가 이런 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 딸의 행위를 볼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하나의 수행성의 도구라고 보여지는데, 랑시에르라는 비평가도 얘기를 했듯이 영화 자체가 갖는 어떤 혁명적 힘이 있는 것처럼 두 딸의 선택이 영화는 개인의 잘못이나 결함으로 환원해서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죠. 그 대신 가정 폭력, 빈곤 불안정성, 사회적 규범의 억압, 종교적 극단주의를 포함한 이런 튀니지의 구조적이고 다층적인 요소들이 더 강력한 규범밖에 선택의 여지를 만들어주지 못한 그 사회와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준다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들은 연기에만 몰두하는 것도 아니고 그 연기하는 것을 계속해서 연기자와 실제와 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도록 관객에게 계속 촉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관객에게 지금 현재 이런 상황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호소하는 영화라고 보여진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여기서 제가 올파의 독백이라고 적었지만 올파와 올파 역할을 하는 배우의 독백, 두 사람의 각 대화가 대물림된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한 절실한 희망을 이제 드러내는 거죠. 결국은 엄마가 반성을 하는 거죠. 난 새끼를 너무 걱정해서 지키지를 못했다. 나의 과거는 내 삶과 내 딸들의 삶을 규정했고 우리 엄마가 내게 한 짓을 송두리째 내가 딸들에게 반복했다는 것이 정말로 두렵다라고 이제 얘기를 한 거죠. 그래서 이제 이 사슬을 끊는 세대가 등장하는데 이게 바로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삶을 물려주자라고 얘기하는 게 거의 영화의 마지막 끝에 나오는 거죠.

 

이제 권력의 정신적 삶이라는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빌려왔을 때 이제 어머니의 이 과도한 폭력은 어디서 나오냐면은 어머니의 트라우마라든가 어머니의 우울증에서 나온다는 거죠. 규범 속에 제대로 포섭되지 못한, 버틀러의 주장을 빌리면 알튀세르적 호명에 응답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주체는 자신을 억압하는 규범에 자꾸 집착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올파와 마찬가지로 라흐마와 고프란의 급진화는 과정은 지역사회 국가적 가부장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면서 동시에 더 강력한 규범의 재예속으로 읽힐 수가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재예속된 두 딸을 상실하고 두 딸이 이제 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때 남아 있는 가족들은 규범의 바깥으로 몰려나고 멜랑콜리의 우울증적 주체로 완전히 비체화돼서 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으로 여기서는 이제 감독의 역할이죠. 감독이 계속 질문하고 배우가 개입하고 카메라는 이런 우울증적인 주체들에게 올파와 두 동생들에게 호명이라는 것은 너는 무엇이 되라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라면은 끊임없는 말 걸기를 시도 해서 자기 반성을 유도하고 이것이 경찰 국가 종교의 일방적 명령 즉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 응답과 질문을 통해가지고 지배적 호명에 저항하도록 만들고 그것을 저항하는 이 행위 자체를 관객에게 호소하는 행위로서 바꿀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에야와 타이시르의 말과 표정 그리고 어머니의 자기 질책을 통해서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침전된 멜랑콜리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침전된 우울증적 주체 자체는 전달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규범의 주변에 있기 때문에 근데 이것을 끊임없는 말 걸기를 통해서 전달 가능한 언어로 바꾸어서 언어와 그 이미지로 바꾸어서 우리에게 계속 호소하고 들어달라고 간청하는 이런 책임감이죠. 응답 가능성은 관객에게 계속 요청하는 것이라는 거죠. 버틀러는 나를 억압하게 하는 규범에 대한 집착이 주체의 형성 조건이지만 그 이상화된 규범을 완전하게 반복할 수 없는 바로 그 어긋남을 보여주는 것이 이런 예속의 회로를 그대로 재현하면서도 그 회로를 탈선하게 하는 수행성이기도 하다라는 것을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다라는 게 제가 읽은 주디스 버틀러를 통해서 읽은 이 영화였습니다. 이상입니다.

 

 

김지희: 네. 교수님 너무나 첨예한 분석 감사하고요.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 저도 좀 고민이 많았는데 교수님 강연을 듣고 나니까 좀 제가 고민할 수 있는 지점들을 많이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그러면 오늘 이렇게 여기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깊이 있는 해석이 저희와 함께 오랫동안 남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좋은 강연 감사합니다. 함께 살펴가시길 바라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녹취 및 정리 : 김원정 (아카이브팀 ALT루키)

촬영 및 영상 편집 : 한수인, 손지우 (아카이브팀 ALT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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