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건립에 관한 텍스트로 막을 올린 <창경>은 형체가 불분명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관객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것들의 정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다.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유기체의 소리를 통해 현미경으로 바라본 미생물의 움직임쯤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어 일제가 조선 황실의 권위를 훼손하기 위해 창경궁 안에 동‧식물원을 조성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새로운 정보가 더해지면서 화면은 점점 더 부드러운 움직임을 띠지만, 여전히 스크린 속 대상의 정체는 모호하다. 언뜻 보이는 나뭇잎의 형상과 소리를 통해 자연을 떠올릴 수 있을 뿐, 이미지의 맥락과 의미는 미궁 속에 있다.
이미지의 정체를 짐작하게 하는 실마리는 “비상시 모든 동물을 독살한다”는 일제강점기 동물원의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동물 처치는 약물을 원칙으로 하되, 여유가 없을 경우 총살마저 허용된다. ‘비인간적인’ 명령 아래 이전의 두 이미지가 서서히 겹쳐지기 시작한다. 낙엽을 밟는 소리는 더 이상 기분 좋은 향취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동물의 생사가 무자비한 인간의 손아귀에 놓여있다면,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식물들은 오죽했을까. 인간의 야욕에서 비롯된 공습은 결국 동물원에 갇힌 가여운 생명의 떼죽음으로 귀결된다.
창경궁을 둘러싼 동식물의 사연을 인지한 뒤부터, 영화는 점차 명확해지기 시작한다. 이제 영상 속에서는 가위질이 한창이다. 관객은 여전히 가위의 날이 향하는 대상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손, 가위, 그리고 무고한 생명이 병치된 이미지는 살처분의 역사와 맞물리며 섬뜩함을 자아낸다. <창경>의 모호한 화면 속에는 필름을 재료로 수작업을 실천해온 이장욱 감독의 예술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번 작품은 동물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감독의 유년 시절 기억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는 창경궁을 둘러싼 동물 수난사를 알게 된 이후 더 이상 이전의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대상에 대해 알면 알수록 마음 놓고 즐길 수 없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 <창경>은 이미지가 명료해지며 지각이 확장될수록 불쾌함이 증폭되는 구조를 통해,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을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되짚은 뒤, 스크린은 다시 필름을 재가공한 이미지로 되돌아온다. 죽음을 앞둔 동물도, 섬뜩한 가위질도 사라진 화면은 비교적 평화로워 보인다. 이때 필름의 갈라진 표면이 도드라지는 이미지는 메마른 대지의 결을 연상시킨다. 빛이 번져나가며 대지는 점점 별로 가득한 성운을 닮아가고, 광활한 우주의 이미지는 칼 세이건의 교훈을 상기시킨다. 우주의 한 티끌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리도 남을 해쳐왔는가. 창경궁 복원 사업으로 창경원의 동식물들은 현재 1986년 개장한 서울대공원으로 모두 옮겨졌다.
김현승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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