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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 CRITCISM - 해파리와 함께하는 비평 웹진

[2021] 안에 있는 자, 밖에 있는 자 (정현석) – 이혜미 관객위원
nemafb 조회수:2166 추천수:1 222.110.254.205
2021-09-01 12:28:11

방 안에서 누군가 분사(焚死)한다. 창밖에선 누군가 낙하한다. TV 화면과 창문 너머 추락하는 타인의 고통을 무심히 누워 관망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스크린 너머 보는 관객도 방관자가 된다.

타인의 고통은 그저 이미지, 데이터, 노이즈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러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미되면 볼거리가 되고 이를 보러 가거나 이야기 나누는 이들은 관객이 된다.

 

TV 속 이미지는 ‘하녀’(1960)의 파멸로 치닫는 장면을 발췌했다. 추락하는 하녀와 절망하는 동식의 얼굴이 디졸브되어 점멸한다. 둘의 이미지를 겹침으로써 추락의 주체와 목격자는 고통이라는 한 프레임에 범주화할 수 있다고 관계 짓는다.

점멸하는 화면에 가까이 갈수록 화질은 열화 되어 픽셀의 깜박임만이 보인다. 흑백의 깜빡임은 불꽃놀이로 변모하고 초점이 흐려지자 반짝이는 물비늘 같아 보인다. 생은 덧없지만 화려한 불꽃이고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다. 수직으로 꼿꼿이 들어 활활 타오르는 손은 흡사 붉은 꽃 같고 사람도 한 번 타오르고 마는 일생을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이르러 TV 앞의 와상도 분사하고 만다. 누워 있던 모습은 집이 사라지고 밖에 나게 되자 쓰러진 사람으로 보인다. 철거 잔해와 분사한 사람은 하나의 생을 다했다. 검은 배경과 대비되어 밝게 타오르는 손은 곧 검게 떨어질 재가 되고 어둠에 묻힐 것을 예정하고 있다. 타들어가는 소리인지 TV 잡음인지 모를 기척만이 남는다. 이 자도 타인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낡아버려 살 수 없어진 집은 허문다. 완전연소하여 살 수 없어진 사람은 재처럼 떨어진다. 격렬하게 생이 꺼져가는 타인을 봐도 태연했던 자세는 정지에 불과했고, 타인에 관심을 껐을 때 겪는 감정의 마비였다. 인간관계의 끈이 희미한 아웃사이더는 더 이상 서있을 힘 없이 추락한다. 관심으로 세운 기둥과 지붕으로 지탱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내 차례가 됐을 때, 나를 바라볼 누군가는 미동조차 않을 것인가. 등 뒤에서 누군가 나의 고통을 관망할 생각을 하니 누워있게 될 등골이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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