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쌍의 조우>는 구(球) 형태의 자리 두 개가 마주 본 것 같은 좁은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그곳은 전시 영상 중 처음과 끝에 나오는 ‘걷고 있는 나’의 모습과 닮기도 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끊어진 8자 모양이다. 관객 한명이 구멍을 비집고 들어가야만 ‘조우’는 시작된다. 조우하게 된 그 자리에서 관객은 전시 영상이 나오는 화면을 피할 수 없다.
여섯 개의 씬으로 이루어져 있는 싱글 채널 비디오 속에서 쌍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떠한 여섯 쌍이 만났다는 걸까? 0과 1. 1과 0. 비디오 속 그들의 대화는 이진법으로 만들어진 컴퓨터 속 전자 신호 같다. 대화가 아니라 그냥 ‘대화’라는 모양새로 적힌 의미 없는 패턴 같다. 소통의 근간이 되는 액션 – 리액션이라기보다는, 나도 말하고 나와 다른 또 다른 ‘나’인 ‘너’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느껴진다. 쌍은 둘씩 짝을 짓는 것을 말한다. 나는 ‘짝짓기’라는 단어에서 일차원적으로 동물의 교미를 떠올렸다.
한 씬당 아마도 두 명의 존재가 있는 듯 했다. 그들은 한 장면 안에서 하나의 쌍으로 합쳐졌다. 그렇게 만난 여섯 쌍은 또 하나의 비디오로 합쳐졌다. 맥락을 읽고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든 해석해 보겠다며 화면 속 구멍의 개수를 세는 것만큼 바보같은 짓이 없었다. 내가 집중해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많은 구멍이 생성되고, 딸깍거리며 조우하는 동안 내가 느낀 ‘불쾌함’. 설치된 전시 작업물과 한 쌍으로 맞닥뜨린 내가 반응하는 지점. 그 감정의 끝자락이 내가 집중해야 할 곳이었다. 이 작품은 미지의 대상과 반갑지 않게 맞닥뜨리는 존재들의 사고(思考) 기록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너무나 어려운 섹슈얼리티와 긴장감을 시스템 속 수의 체계로 환산해보려는 시도. 이 수식에 이제 나는 나의 반응을 기입한다.
구멍으로만 본다. 구멍만 필요하다. 구멍이면 된다. 구멍, 구멍, 구멍. 이러한 호칭은 한 사람의 인격을 삭제한다. 성적 자기 결정권과 의사 표현을 묵살한다. 전체 대화의 흐름은 ‘아니’는 ‘응’이 되는 엇박자 가위바위보다. 한 사람이 관계의 주도권을 독점함으로써 증발해버린 이해관계. 아무리 굴러도, 어떤 자세를 취해도. 심지어 그곳이 자신의 침대여도 그녀는 편하게 잠들 수 없다.
창작자는 아주 조금의 의도는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기획 의도, 연출 의도 등에서 출발하여 만들어지는 작품들. 관객이 보고 나오며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걸 의도하여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 모두가 외면하는 사회 깊은 곳의 의제를 끄집어 보여주기 위한 작업도 있을 것이다. 나는 수많은 의도 중에서 작품을 통해 관객이 체험하게 만드는 ‘의도된 쾌감’과 더불어 ‘의도된 불쾌함’ 또한 있을 것이라 가정하고 싶다. 전시를 보며 나는 내가 구멍이 된 듯했다. 그리고 그래서 불쾌했다. 누구도 나보고 불쾌함을 느끼라고 한 적은 없다. 나는 그저 반응할 뿐. 어느 날 맞닥뜨렸던 0과 1의 대화처럼.
0 : 네 눈에 나는 구멍
0 : 화면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난 구멍들이, 네 눈에도 돋아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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