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되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44주년을 맞이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작품들이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그해 5월의 광주를 기억해 왔다. 심혜정, 정기현, 김홍빈 감독의 <꽃핀 쪽으로>는 문학과 영화의 결합을 시도하며 5월의 광주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사유하기를 촉구하는 작품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순간에 존재했을 인물들의 시점에서 옴니버스로 쓰인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그 속의 몇 구간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영화는 <소년이 온다> 1장 ‘어린 새’의 첫 세 문장을 말하는 남성 화자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이에 대답하듯 6장 ‘꽃 핀 쪽으로’를 읽는 전문 배우의 내레이션이 오월어머니의 얼굴을 비추는 화면 위로 이어진다. ‘꽃 핀 쪽으로’는 막내 아들 동호를 잃은 어머니의 시점에서 기록된 이야기다. 마치 오월어머니의 경험을 대신 증언하는 것처럼 진행되던 내레이션이 일순간 뚝 멎으면, 오월어머니는 스스로 책을 들어 낭독하기 시작한다. 전문 배우의 매끄러운 목소리와 달리, 오월어머니의 입에서 직접 발화되어 느릿하게 더듬더듬 읽어나가는 목소리가 영화의 사운드를 채운다. 한참 책을 읽던 오월어머니 목소리 위에 다시 전문 배우의 내레이션이 중첩되고 전환된다. 이 전환이 반복된다. 6명의 오월어머니와 3명의 전문 배우가 동호 어머니가 되어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월어머니-전문 배우의 목소리가 교차하는 가운데, 현재 광주의 곳곳이 조용히 저마다 모습을 드러낸다. 가령, 소설 속 동호 어머니가 도청에 찾아가 애원하는 문장이 낭독되는 동안 카메라는 그 전라남도청의 지금 이 순간을 비춘다. 그날의 총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벽을 보면서 비전문 배우와 전문 배우의 목소리가 뒤엉킨 음성을 청취하다 보면, 5월의 광주가 점이 아닌 선의 역사라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다. 남겨진 가족의 기록인 ‘꽃핀 쪽으로’가 오월어머니들의 목소리와 결합하며 소설과 기억 속에 박제된 역사를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하기 때문이며, 시·공간성이 모호한 전문 배우들의 내레이션은 광주 곳곳에 스민 상흔들과 만나 1980년 5월 민주항쟁의 순간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에 여전히 녹아 있음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동호로서 영화의 시작을 열었던 남성 화자의 내레이션이 끝에 이르러 다시 등장한다. 소설 ‘꽃 핀 쪽으로’를 닫는 마지막 몇 마디를 읊는다. “엄마,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 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동시에 카메라는 풀잎들 사이로 걸어 나가는 한 오월어머니의 뒷모습을 담는다. 꽃은 없지만 환하게 밝고, 온통 푸르르다. 5월의 광주는 과거이자 현재이다. 동시에 미래가 될 것이다. 밝은 곳으로 나아갈 것이다.
글. 이슬기. 네마프2024 비평웹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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