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죽음 그리고 죽음
공포라는 감정은 어디에서 만들어질까? 지금 여기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존재할 때 낯선 두려움이 촉발된다. 익숙한 장소에 언제나 있던 물건이 자꾸만 하나둘 사라지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바퀴벌레와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의 감정. <원 모어 펌킨>은 생성형 AI 이미지 속에서 이러한 식별 불가능한 두려움을 담아낸다. 작품이 제시하는 일관되지 못한 이미지, 가령 일그러진 인물의 얼굴이나 덩어리처럼 뭉개진 손가락 등은 현시점 생성형 AI 기술의 한계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히려 영화의 내러티브와 같은 맥락 안에 놓인다. 어쩌면 그 무서운 호박이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실재한 적 없지만 우리 눈앞에 분명히 존재하는 생성형 AI 이미지의 공포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원 모어 펌킨>의 이미지들은 이번 페스티벌의 주제처럼, 텍스트, 이미지, 사운드 등 기존에 존재하는 데이터를 AI에 입력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데이터다. 기존에 없던 데이터의 박제이다. 박제는 죽음을 붙잡아 새로운 생의 의미를 만드는 행위이다. 작품 속 AI 이미지가 공포스러운 이유는 작품에 박제된 죽음이 또 다른 생이 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죽음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원 모어 펌킨>은 생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죽음,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의 연쇄만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저승사자를 노부부가, 노부부를 호박이, 호박이 같은 호박을 서로 먹어 치워 파멸한 후, 세상에는 보라색 호박만이 남았다고 전해진다. 가족들이 단란하게 식사 중이던 테이블 위의 보라색 호박이 관객을 응시하는 순간, 우화로 남을 수 있던 이야기는 또 다른 죽음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 끝이 난다.
생성형 AI 이미지의 박제에 뒤따르는 영화적 공포 역시 같은 논의를 공유한다. 펜이나 카메라를 거친 적이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이미지가 주는 낯선 감정은 영화의 존재론적 위기와 맞닿는다. 영화는 지금까지 죽음이라는 이름의 위기를 여러 차례 부여받았다. 소리, 색, TV와 비디오, 리모트 컨트롤, 그리고 디지털까지. 각각의 사후에는 전에 없던 변화로의 이행이 뒤따랐다. 즉, 죽음 이후 새로운 의미의 생동이 있었다. 현재 영화는 AI 기술을 맞닥뜨렸다. 권한슬 감독은 생성형 AI 기술을 통해 이 영화를 단 5일 만에 제작할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즉, <원 모어 펌킨>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상황과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한 채 완성된 동시에, AI의 데이터 속에서 탄생한 계획적이고도 우연한 이미지들의 얽힘인 것이다. 이러한 생성형 AI 이미지 기술은 창작자에게, 관객에게, 궁극적으로 영화에게 어떠한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을까? 그것은 과연 생일까? 하나 남은 보라색 호박이 어떤 의미로 작용할지 알 수 없도록 열어둔 채 마무리된 작품의 결말처럼, 영화의 미래 역시 현재의 우리로서는 역시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 무지의 공포를 밀어내다 보면, 결국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바쟁의 질문으로 끊임없이 돌아가게 된다. 우리가 맞닥뜨린 낯선 것이 영화를 잡아먹을 호박일지, 도리어 영화에게 잡아먹힐 저승사자일지 가늠하기 위하여.
글. 이슬기. 네마프2024 비평웹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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