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없는 빛
사담으로 글을 여는 것에 대해 미리 용서를 구하려 한다. 본래는 박세영 감독의 전작에 대해서는 적지 않을 생각이었다. <땅거미>를 보며 일전에 젊은 감독들이 사용하는 ‘빛’에 대해 학교 동료와 짤막하게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언급된 영화 중 하나가 박세영 감독의 <다섯 번째 흉추>였다. 문득 박세영 감독에게 있어 빛은, 또 그것에의 충동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영화에서 빛은 늘 거기 (이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대개 표현적 효과를 위한 조건일 뿐 촬영 대상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박세영 감독의 영화를 포함한) 몇몇 영화들을 볼 적에는 때때로 영화에서 ‘빛을 찍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다소 설명하기 까다로운, 그러니까 순전히 빛이라는 질료에 매혹되는 것인지, 빛이 만들어내는 환상에 이끌리는 것인지 딱 집어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충동을 눈앞에 두고 판단을 보류한 채 극장을 나서야 했다. 당장 생각나는 장면으로 <다섯 번째 흉추>에서 봉고차 내부를 초록색 빛이 채우는 장면이 있겠다, 거기에는 빛이 포자처럼 퍼지면서 화면을 지배하는 듯한 강렬함이 있었다. 우선 그 광경을 머리에 남긴 채 <땅거미>를 이어서 보았다.
<땅거미>의 시놉시스는 짤막하다. “남자랑 개는 매일 해질녘에 뒷산을 오른다. 노을이 질 때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빛을 추적한다. 숲은 깊고 노을은 이미 졌다.” 속삭이는 듯한 부름에 이끌려 남자와 개가 추적하는 빛들은 산속에서 도깨비불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포착되지만 포획되지 않으며, 촬영되어 색이 반전되고 변형되거나 소실된 이미지 속에 그 일부가 잔존한다. 영화 중간 거대한 빛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듯 이미지들을 훑고 가면서 화면을 채우던 자연광을 몰아내는데, 이 때문에 남자 자신이 직접 빛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빛이 출몰함에도 <땅거미>에서의 빛은 그저 거기 있을 뿐 거기서 특정한 의미를 추출해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질문하게 된다. 이 빛은 누구인가? 신인가, 외계인인가, 귀신인가?
하나 특기할 것은, <땅거미>에서의 빛들이 색과 관계 맺고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빛을 색의 문제로 접근했을 때 색을 반전시키거나 색온도를 조절함에 따라 특정 값의 색깔이 마치 빛을 내는 것처럼 두드러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방법은 대개 영화적이라기보다는 회화적인 것에 가깝다. 때문에 <땅거미>에서의 빛들은 단순히 촬영의 조건으로서의 빛이 아닌, 표현된 질료로서의 빛으로 기능한다. 이 빛은 의미화된 무언가도, 영화의 주변부에 머무르는 존재도 아니다. 다른 조건과 유동적으로 관계 맺으며 출몰하는 일종의 ‘현상’인 것이다. 결국 이 빛의 정체보다는 이 빛을 추적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해진다.
의미화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빛에 가 닿고자 한다는 말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땅거미>는 단순히 빛의 존재를 규명하고 코드화하고자 함이 아닌 빛이 만드는 형상에 다가서고자 함을 충동의 근거로 삼는 영화다. 만약 이 영화가 영화이자 회화이자 사진으로 보인다면, 그 까닭은 모호하게 자리잡은 빛과 그것이 주는 기묘한 매혹에 있을 것이다. 이 빛은 질료이지만 무게를 갖지 않는 유령이요, 시각적이지만 재현 불가능한 현상이다. 마치 앞서 언급한 <다섯 번째 흉추>에서 봉고차 안을 가득 채운 빛이 사실 봉고차라는 공간을 실제로 점유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그렇기에, 다시 박세영 감독의 언어를 빌리자면, “멀리서는 보이는데 가까이 가니까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글.성진혁.네마프2024 비평웹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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