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쓰는 몸>, 몸으로, 영상으로 소리로 쓴 시네포엠(cine-poem)
우리는 모두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과 교감하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몸은 이 세계와 교감하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 세계 자체이기도 하다. 거대한 우주는 수많은 은하로 이뤄져 있고 이 은하는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 별들 중 하나가 우리가 사는 지구이다. 이 지구에는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과거에 살았던, 현재에 살고 있는 그리고 미래에 살아갈 사람들은 모두 이 땅을 터전 삼아 명멸한다.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라는 세계와 마주한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하는 또 다른 세계는 점점 늘어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대면하게 될 세계를 듣고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본다. 그러므로 몸은 우리를 이 세계와 연결하며 교감하게 만든다. 박시원의 7분 남짓한 에세이 필름은 우리 몸과 세계의 마주침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유년, 청년, 노년의 몸이 이 세계를 감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시를 쓴다. 이 작품의 제목은 <몸에 쓰는 시>가 아닌 <시에 쓰는 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는 추상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시·공간이다. 그가 영상으로 쓴 시의 재료는 텍스트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몸이라는 질료 혹은 시간 이미지다.
유년의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몸의 환유로서 ‘이마’를 떠올린다. 아이는 인식론의 차원에서는 아직 상상계에 머물러 있기에 세계를 총체성이 아닌 파편으로 인식한다. 감독은 아이에게 손에 대해, 발에 대해, 다리에 대해, 무릎에 관해서 설명해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이는 ‘이마’를 선택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혹은 직관적으로 현상학을 이해한다. “이마가 좁으면, 주름이 많으면, 튀어나오면 그 사람은 어떠하다”라는 죽은 지식으로 이마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는 삶은 달걀을 깔 때 도와주는 이마, 감기에 걸렸을 때 온도를 알려주는 이마, 가위바위보에 졌을 때 벌칙을 받아주는 이마를 말한다. 아이는 이마를 이마 자체로 받아들이며, 때로는 도구, 몸의 상태를 알려주는 척도로 활용한다. 아이는 이마로 대변되는 몸으로 이 세계를 느끼고 받아들인다. 아이가 청년이 되면 그는 몸을 통해 외계와 소통한다. 청년은 땅에게 나의 영원한 자궁이 되어달라고 간청한다. 생산을 담당하는 신들은 모두 대지와 연결되어 있다. 청년은 자신이 땅에 뿌리를 두고 자란 나무라고 확신한다. 대지는 그 자체로 몸의 자양분이 되어 굽은 등을 쭉 펴게 만든다. 그리하여 ‘꼿꼿한 순간’이라고 명명된 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대면하게 한다. 청년은 자신과 자기 몸의 기원이 이 땅에 있음을 명징하게 깨닫는다.
감독은 노년의 삶에 가장 공을 들인다. 왜냐하면 지금 청년인 감독은 유년과 청년 시기를 경험해서 알고 있지만, 그에게 노년은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독은 김혜순의 시 ‘흐느낌’에 기대어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노년을 ‘북 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김혜순의 시 ‘흐느낌’은 노년의 삶을 이야기한다기보다는 몸에 깃든 신명, 도저히 거부할 수도, 떨쳐낼 수도 없는 원시적 열정을 토로한다. 시인은 그 열정이 느닷없이 빗줄기처럼, 핏줄기처럼 깊이 숨어들 때, 극한의 생의 감각을 느끼면서 춤추는 사람 천명이 쏟아져 나온다고 노래한다. 감독은 “여름비가 오열하는 파도처럼”이라는 시구를 “여름비가 오열하는 북처럼”으로 바꾸고, 화면 가득 북소리를 진동시키면서 노년을 ‘북 치는 사람’으로 은유한다. 이것은 일종의 도발이고 전복이다. 도대체 어느 누가 노년을 이토록 생의 열정이 넘치는 시간으로 표현했던가? 이것은 김혜순 시인의 것이 아니다. 김혜순은 단지 발화만 했을 뿐이다. 시인의 언어를 변주한 감독은 추체험한 노년의 몸으로, 영상으로, 소리로 시를 쓰며 시네포엠(cine-poem)의 멋들어진 예시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김채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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