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으로 기억하기, <원룸 제단화>
철학자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이라는 글에서 그리스 신전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신이 그 신전 안에 현전한다고 말했다. 바위 계곡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거대한 주랑일 뿐이지만, 그러한 신전이 있지 않다면, 신이 도래한다고 해도 신이 어디에 도래하고, 또 어떻게 신을 마주하며, 신에게 기도할 수 있을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신전을 만드는 일을 하나의 세계를 건립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예술가가 하는 일은 바로 그러한 세계의 건립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계의 건립이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 그저 천재적인 작가로 인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데, 신전에 신이 도래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 민족들이 그 동안 살아온 문화적 터전이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세계가 건립될 수 있도록 하는 이러한 문화적 터전을 ‘대지’라고 불렀다. 이는 그리스인들이 퓌시스, 즉 자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의미하는 퓌시스를 관습적인 것, 질서 지어진 것, 이성적인 것과 구분하여 생각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를 짓는다는 건 이 퓌시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퓌시스에 관습이나 질서, 이성을 부여하면서 변형하지 않고, 자연을 그저 있는 그대로 피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시짓기다. 예술가의 창조는 오히려 퓌시스가 스스로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것, 그래서 자연을 그 자신으로 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원룸 제단화>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는 시짓기처럼 보인다. 이미지로 쓰는 시인 것이다. <원룸 제단화>는 아버지의 죽음 뒤 어떤 개인적인 관점들이 가진 구체성들을 덜어내고, 아버지를 그 자체로 그 자리에 있게 하는 일을 시도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사각형을 바닥에 그린다. 그리고 그 위에서 자유로운 제의적 움직임이 펼쳐진다. 그 뒤 남는 것은 아버지와의 만남도 아니고, 개인적인 상상도 아니며, 그저 여느 방과 다르지 않은 인테리어 도안처럼 펼쳐진 방 한 칸이다. 그런데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아버지이며, 죽음이며, 삶일 수도 있겠다는, 그래서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존재하게 만든 것일 수 있겠다는 확신보다는 짐작이 생겨난다. 혼란스러운 이미지들 속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로 다시 피어나고, 아버지의 삶과 죽음에 대해 작가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결코 온전히 접근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진실로서 전해져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진실에 대한 확신이 아니다. 우리는 진실에 대한 막연한 느낌만을 가질 뿐이다. 다만 그 느낌 속에서 우리는 추상화함으로써 비로소 진실에 다가가는 그 과
정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안다.
강선형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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