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합니다? 난초의 행성입니다
<(환영합니다) 난초의 행성입니다>라는 제목의 ‘환영합니다’에는 괄호가 쳐져 있다. 이는 환영한다는 것일까, 결코 환영할 수 없다는 것일까?
<(환영합니다) 난초의 행성입니다>는 인간의 언어로 친절하고 너그럽게 말해주는 난초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해 4장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난초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영상들의 향연을 보여준다. 1장 ‘(비 식물) 인간의 착각’은 난초와 식물들, 자연을 대하는 인간들의 일방향적인 사고를 난초의 관점에서 조목조목 짚어 가는데, 때로는 자연의 일부처럼 자연 속에서 힐링을 찾고, 때로는 자연의 지배자처럼 판단하고 이용하는 모습들을 재치 있게 지적한다. 2장 ‘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에서는 뉴스 형식의 영상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난초 뉴스’다. 난초의 관점에서 인간들의 행태를 고발하고, 또 공생의 관계를 모색하는 뉴스를 통해,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며 고유한 문화를 가질 수 있는 식물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뉴스의 끝에는 마치 식물을 보호하는 인간들의 기관의 광고처럼 보이는 영상이 등장하면서, 마치 식민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운동과 프로파간다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또한 3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흑백 영화 ‘우리 마을 이웃들’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채플린이나 키튼 등을 통해서 잘 아는 흑백 영화의 리드미컬하고 유쾌한 움직임을 식물들과 곤충들이 보여주면서, 인간들이 생각하듯 쾌락과 고통이 없이 부동적이기만 한 것이 식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3장 ‘상호 감각적 풍경’에 이르면, 드디어 난초가 독립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난초는 생물 종 전체는 평등하다고 선언하면서, 초월인간적 존재 간의 연대를 지지한다. 이러한 선언 이후 상호감각적 풍경이 펼쳐지는데, 이때의 감각은 인간의 것도, 식물의 것도 아닌, 들뢰즈가 ‘분자적 지각’이라고 불렀던 지각에까지 나아간다. 들뢰즈는 『시네마』에서 인간 이상의 지각, 더 이상 고체적이지도 않고, 더 나아가 액채적인 것마저 넘어서, 분자적인 지각을 이야기한 바 있는데, 이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구분을 넘어서는 카메라의 독특한 지위 덕분에 가능한 지각이다. 인간의 주관적 지각에도, 그리고 <(환영합니다) 난초의 행성입니다>에서 새로운 주관처럼 등장하는 식물의 주관적 지각에도 머물지 않고, 상호 감각적인 사이-지각이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3장에서 인간을 초월한 지각의 가능성이 드러났다면, 마지막 4장 ‘난초의 행성’은 식물들의 지각을 드디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듯한 이미지들이 구현된다. 수평선이나 수직선, 상하좌우 등 인간들의 관점이 가진 고정관념들이 사라지고, 같은 풍경이 다르게 구현되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제목의 ‘환영합니다’에 괄호가 쳐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낯선 경험을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낯섦을 헤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환영’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환영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저항과 절망과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식물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는 과연 시작될 수 있을까?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환영 받을 수 없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환영 받을 수 있기를.
강선형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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