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타인의 고통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 소녀가 있다. 소녀의 이름은 진하. 어릴 적 우연히 티비 속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난민의 모습을 목격한 뒤, 충격으로 말을 잃은 그녀는 발화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점은 영화 속 진하를 굉장히 유별난 인물로 보이게 만든다. 실제로 진하의 부모님조차 끈질기게 함구하며 수어를 배우러 다니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를 달래보기도 하고 화를 내보기도 하지만 역부족이며, 그럴수록 그녀 머릿속에 그려지는 끔찍한 이미지는 더욱 강해질 뿐이다.
사실 이 같은 진하의 모습은 서사의 내부가 아니더라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실제로 고통의 도상학, 즉, 예로부터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며 모종의 카타르시스 느껴왔다는 역사는 길지만, 누군가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겪은 고통을 영원히 잊지 못해 괴로워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가 없다. 그러한 이유로 진하의 캐릭터는 더욱 허구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물 학대, 기후난민과 같은 문제를 미루어본다면 진화가 가진 유별남은 오히려 그러한 이슈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무고한 희생은 사람들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마침내 나는 이 ‘타인의 고통’이라는 지점에 입각하여 박소현이 감독의 <나와 내가 아닌 모든 것>을 이야기해보기로 결심했다. 특히 앞서 여러 번 언급되었던 ‘타인의 고통’ 개념을 주창한 수잔 손택의 동명 저서, ‘타인의 고통’1) 을 경유하며 말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종교적 메타포이다. 목사인 아버지와 기독교인 어머니로 표방되는 종교적 메타포는 볼거리의 초기 역사를 담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손탁에 의하면 우리가 고통의 볼거리에 대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때, 제일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신적인 존재의 고통과 지옥에 대한 묘사이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재현들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흥분시키는 동시에 어떠한 깨달음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관람객은 생전에 잘못을 저질에 지옥에 가게 된 이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자신을 심판하게 되고, 만약 떳떳하지 않다면 움찔거리게 된다. 즉, 신의 위치를 대신하는 회화를 보며 우리는 그것에 안도하기도 또는 반성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2)이다.
이러한 점에서 감독이 영화 초반부에 등장시킨 골고다 언덕에서의 일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골고다 언덕은 예수가 십자가에 몫 박혀 죽은 곳으로, 인류의 죄가 씻겨지는 기독교적 순결의 기준이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십자가라는 상징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는 절대적 도구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는 진하의 가족이 모두 모여 성경을 통독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이 하는 행동을 미루어볼 때 이와 같은 행위가 꽤 주기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성경을 읽음으로서 자신들의 죄를 주기적으로 사하려고 하는데, 이는 다시 말하면 ‘타인의 고통’을 담보로 하여 삶의 안정을 찾으려는 이기적인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수난을 일종의 도구로써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진하가 영화에서 행하는 수어를 통한 비언어적 말하기는 이 같은 이기심에 맞서는 하나의 대안으로 상정될 수 있다. 온전히 공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고 함구하기. 어쩌면 그것은 타인과의 공존으로 향할 때 가장 먼저 실천되어야 할 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진하의 경우, 공감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심한 나머지 자신을 학대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심히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같은 작품의 모습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고민하는 현대 사회의 과도기적 현상을 본다면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2018년 미투 운동 (#Me_too)을 시작으로 퀴어, 질병 등의 소외되어 있던 존재들이 주체화의 가시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한 운동은 사회적 진보를 이룩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의미 있지만, 또 동시에 그러한 담론이 활성화되며 생겨나는 수많은 개념들과 분류들을 탄생시키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이 같은 혼란은 당연하지 않던 것들이 당연해져 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긍정적인 혼란이다. 하지만 동시에 필연적으로 낯선 감각들을 받아들이는 그 과정은 불편하고 불안한 시간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실제로 박소현이 감독은 “이같이 급변하는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에서 영화가 탄생했다”라고도 밝힌 바 있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세상의 이야기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진하의 캐릭터는 사실 감독 자신임을 말할 수도 있겠다. 결국 영화는 감독 자신을 향해 지속하는 발화의 과정으로 불러일으켜진다.
그렇다면 감독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혼란에 응답했을까? 서사는 진하를 민재라는 이름의 남성과 우연히 마주치게 함으로써 결국 사랑으로 나아간다. 이때 사랑은 성애적인 사랑이 아니라 연대와 존중으로 이루어진 보편적 사랑이다.
특히 감독은 그들의 관계를 단번에 묶어놓지 않고 ‘오해’라는 사건을 도입하여 주인공 진하를 성장하게 만드는데, 그 과정이 인상 깊다.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던 민재는 수어를 쓰는 진하가 자신과 비슷한 존재라는 생각에 동질감을 느끼고 친절한 태도를 보이지만, 헤어질 무렵 진하가 실은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밝히자 차게 식는다. 진하는 그러한 민재를 붙잡아보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순식간에 어긋난다. 이 같은 어긋남은 너와 나의 세계가 다르다는, 그 좁혀질 수 없는 간극에 기인한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래서 어떻게 이 관계가 봉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냉철한 선긋기가 아니라 따뜻한 발걸음으로 가능하다. 민재와 헤어진 이후 진하는 타인을 향한 트라우마와 고통을 극복하는 모종의 시간을 거치는데, 결국 그녀는 민재가 있는 푸르른 잔디밭으로 걸어가 오랜 시간 돋아있던 염증을 제거하게 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손탁이 한 말을 연관지어 보고 싶다. 그녀는 ‘타인의 고통’에 진정으로 연대하는 방법으로 ‘그들 자체를 존중하라’는 메시지를 남긴 바 있다. 해당 부분의 전문을 옮기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우리’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 운 좋게도 주변 사람들을 쓰러뜨린 죽음에서 벗어난 모든 군인들, 모든 언론인들, 모든 부역 노동자들, 독자적인 모든 관찰자들이 절절히 공감하는 바가 바로 이 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옳다.”3)
이로써 작품은 ‘다가감’이라는 키워드로 끝을 맺는다. 이제 진하는 다른 사람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제가 듣고, 보고, 말할 것이 있다면 능히 그렇게 해달라”고 고백한다.
사실 무성흑백영화의 이미지와 불쑥 등장하는 어린 여자아이의 존재, 그리고 유기적인 연결없이 다음 장면으로 뛰어넘어지는 점프컷 등, 작품의 구성만을 놓고 보자면 해석에 어려움을 주었던 요소들이 꽤 많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적절한 온기를 전해주는 순간들이 몇몇 있었다. 때문에 박소현이 감독의 <나와 내가 아닌 모든 것>은 어린아이를 달래주는 막대 사탕과 같은 영화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사회적으로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혼란과 두려움 대신 마땅히 다가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는 이 작품 투명한 온기를 지닌다.
1) 수잔 손택, 2004, 「타인의 고통」, 이후
2) 같은 책, 65p.
3) 같은 책, 1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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