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섭식장애로 폐쇄병동에 입원해야만 했던 채영과 그녀의 엄마 상옥에 관해 이야기한다. 채영은 2007년, 갑작스레 20Kg가 넘게 빠지며 거식증 진단을 받기에 이른다. 채영의 시간은 흘렀고, 영화는 그녀가 호주로 떠나기 전의 시간을 담으며 시작되는 듯하다. 채영은 떠나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그녀는 다시 상옥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문학이나 영화에서 인물들이 밥을 먹는 장면은 눈여겨보아야 할 장면, 또는 생의 의지가 있는 장면 등 여타의 많은 함의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밥을 먹는 장면의 전후에는 언제나 사건의 국면을 바꾸어 버릴 일들이 벌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언제나 평이하고, 평이한 순간에는 이따금 조금의 긴장감이 감도는 것처럼 보인다.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끊임없는 무언가가 요동친다. 채영은 식당을 할 만큼 건강을 찾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음식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시간은 더욱더 거슬러 이제는 세상에 없는 상옥의 엄마이자 채영의 할머니에게까지로 도달한다. 3세대를 아우르는 모녀의 계보는 병의 기원을 시간의 핵으로 둔 채, 궤도를 형성한다.
보편적 다큐멘터리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뷰로 진행되는 영화는 채영과 상옥의 일상을 찍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특기할 점은 인터뷰어의 질문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채영의 섭식장애를 한 축으로 둔 채 각자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평행선처럼 흘러가는 데에 있다. 영화는 채영의 글과 그림일기,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섭식장애를 앓았던 시기에 관해 ‘재연’한다. 또한, 영화는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에 나왔던 채영과 노동운동을 위해 사무실을 점거했었던 상옥의 과거 푸티지들을 발췌해 두 여성의 개인적 삶을 다룬다. 그럼에도 모녀 관계에서 맞닥뜨리고야 마는 채영과 상옥은 통상 거식증의 원인을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서 찾는 방식에서 기인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영화에는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환자의 85%가 여성으로 구성된, 소위 ‘여성적 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섭식장애는 여전히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 어머니와 딸이 맺는 유대 관계에서, 히스테리적 또는 신경증적 질병으로 여겨진다. 과거의 기억에서 섭식장애에 관한 원인을 파헤치려고 할수록 드러나는 것은 원인 그 자체라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인식되는 몸과 마음의 흔적이다. 영화는 질병 또는 신체의 문제를 다루려고 할 때마다 자꾸만 미끄러진다.
거식증은 가부장제 규범 내에서 날씬한 신체에 대한 동경이나 가부장제 규범의 측면에서 수동적인 존재, 또는 상옥의 말처럼 도덕적 문제로 단순화되곤 한다. 그러나 거식증을 수행하는 몸은 궁극적으로 (임신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여성성을 탈각시키거나, 채영의 말처럼, 자기 신체를 통제하고 극복하려는 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은 이들이 가부장제 질서가 요구하는 규칙의 거부이자 타자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거부와 저항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논의들은 거식증을 낭만화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나, 호주로 떠나는 채영에게 “아프지 마.”라고 거듭 말하는 상옥의 얼굴을 길게 담아내던 카메라는 그 반대편에서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채영의 얼굴은 잠깐 비춘다. 물론 채영도 상옥과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여전히 그녀가 거식증으로 아픈 것이라면, 아플지도 모른다면, 이 동시적인 동시에 비동시적인 질병의 낙인에 관해서, 거식증의 (완전한) 치유/치료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는 당사자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글. A. 네마프X해파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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