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백질>은 과거 목동에서 시흥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철거민들이 살았던 장소인 양천 이주민센터에서 만난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에 관한 작품이다. 우리나라의 이주민 정책은 한국인과 결혼하지 않으면 장기 거주를 허용하지 않아 그들을 불법체류자로 만들어 이곳에 존재할 수 없는 자로 낙인찍는데, 이는 이전에 거주하던 철거민들의 상황과 비슷하다.
작품의 제목인 회백질 gray matter은 중추신경계에서 신경세포가 모여 있어 회색으로 보이는 부분을 지칭한다. 회백질은 뇌로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여 뇌의 겉면을 둘러싸고 있는데, 회백질이 두꺼울수록 정보처리 등의 기능을 더욱 원활하게 수행한다. 이러한 지적기능을 수행하는 회백질로 이루어진 것만 같은 3D 몸체는 뇌와는 다르게 속은 텅 비어있다. 정보를 뇌의 여러 신경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모인 회백질과 달리 3D 몸체는 텅 비어있어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는 꽉 채워진 필리핀 노동자들의 재연 이미지와 대조된다. 그들이 재연하는 것은 공장에서 일하는 본인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의 사연인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장면 등이다. 그러한 재연은 그들이 애도의 행위로 나아가게끔 한다.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애도는 수행적 주체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과정으로, 이러한 애도를 통해 출몰하는 유령은 필리핀 노동자들의 말처럼 “콘크리트 집처럼 나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
유령은 무엇인가와 같은 존재론적 질문은 데리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회백질>은 회백질의 콘크리트 집을 등장시킨다. 이제 작품 속에서 3D 이미지의 기능을 파악하는 것은 더는 의미 없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애도라는 작업 그 자체를 통해 불러와진 3D 이미지가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그렇다면 회백질이라는 작품의 제목을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gray matter. gray = 무명의 사람, matter = 중요하다. <회백질>에 등장하는 필리핀 노동자들의 이름은 전부 불리지 않는데, 오히려 그들의 이름이 불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중요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충돌은 떠나간 사람들의 자리에 떠나온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역설과 연결되며, 작품 속 필리핀 사람들에게 집은 그리운 곳이자 홍수에 의해 사라져 버린 무서운 곳이라는 슬픈 모순과 연결된다. 이러한 충돌과 역설과 모순의 자리로 회백질의 3D 이미지가 돌아옴으로써 작품은 “회백질” 그 자체로써 수행적으로 된다.
글. 난둘. 네마프X해파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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